classzine기록에 남은 저항 · 빼앗긴 땅과 쌀과 길 · 이름과 말을 두고 · 광복과 전쟁이 바꾼 살림

5학년 2학기 · 사회 · 식민 통치와 저항, 전쟁이 바꾼 사회와 생활

지워지지 않은 이름

1919년 · 보성사에서 찍은 선언서

1919년에 보성사에서 찍어 낸 기미독립선언서예요. 어두운 전시대 위에 낱장으로 펼쳐 놓았어요. 오른쪽 끝에 「宣言書(선언서)」라고 크게 쓰여 있고, 본문이 세로로 빽빽하게 이어져요. 끝에는 「公約三章(공약 삼장)」과 「朝鮮民族代表(조선민족대표)」, 그리고 서명한 서른세 사람의 이름이 줄지어 적혀 있어요.

1919년에 보성사에서 찍어 낸 기미독립선언서예요. 어두운 전시대 위에 낱장으로 펼쳐 놓았어요. 오른쪽 끝에 「宣言書(선언서)」라고 크게 쓰여 있고, 본문이 세로로 빽빽하게 이어져요. 끝에는 「公約三章(공약 삼장)」과 「朝鮮民族代表(조선민족대표)」, 그리고 서명한 서른세 사람의 이름이 줄지어 적혀 있어요. · 사진 NZ 토끼들 (위키미디어 공용) · CC BY-SA 4.0 · 1919년에 찍어 낸 선언서 원본이라 문서 자체는 퍼블릭 도메인이고, 전시된 것을 찍은 사진이에요

1920년 1월 1일 · 신년 축하회

1920년 1월 1일 상하이에서 찍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 신년 축하회 기념 사진이에요. 예순 명 남짓이 넉 줄로 서고 앉았고, 뒤에 태극기 두 개가 걸려 있어요. 아래 검은 현수막에 「大韓民國二年元月元旦 大韓民國臨時政府新年祝賀會紀念撮影」이라고 적혀 있어요.

1920년 1월 1일 상하이에서 찍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 신년 축하회 기념 사진이에요. 예순 명 남짓이 넉 줄로 서고 앉았고, 뒤에 태극기 두 개가 걸려 있어요. 아래 검은 현수막에 「大韓民國二年元月元旦 大韓民國臨時政府新年祝賀會紀念撮影」이라고 적혀 있어요. · 사진 독립기념관 (위키미디어 공용) · 퍼블릭 도메인 · 임시 정부가 세워진 1919년이 아니라, 이듬해 첫 신년 축하회 때 찍은 사진이에요

현재 남은 장소 ·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에요. 붉은 벽돌로 지은 긴 건물이 나란히 서 있고, 벽마다 창살을 댄 작은 창이 줄지어 있어요. 건물 한쪽에 커다란 태극기가 걸려 있고, 뒤로 인왕산 바위가 보여요.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에요. 붉은 벽돌로 지은 긴 건물이 나란히 서 있고, 벽마다 창살을 댄 작은 창이 줄지어 있어요. 건물 한쪽에 커다란 태극기가 걸려 있고, 뒤로 인왕산 바위가 보여요. · 사진 Noh Mun Duek (위키미디어 공용) · CC BY-SA 4.0 · 일제 강점기 사진이 아니라, 역사관으로 문을 연 뒤 오늘날의 모습이에요 · 내용과 어울리는 참고 사진이에요

이 시대의 이야기는 흔히 사건의 순서로 배워요. 그런데 그때를 살아 낸 사람들에게는 «그날 무슨 일이 있었나»보다 «우리 살림이 어떻게 달라졌나»가 더 가까운 일이었어요. 땅문서의 이름이 바뀌고, 거둔 쌀이 배에 실려 나가고, 출석부의 이름이 바뀌고, 교실이 천막이 되었어요. 이 호는 그렇게 달라진 생활을 실제 장소와 기록과 사람으로 모았어요.

기사 16꼭지

이번 호

열여섯 꼭지. 기록에 남은 만세부터, 피란이 남긴 국수 한 그릇까지

  1. 01기록에 남은 저항이름이 남은 만세 소리
  2. 02기록에 남은 저항하룻밤에 찍어 이틀 만에 돌린 종이
  3. 03기록에 남은 저항붉은 벽돌 담장 안에 남은 기록
  4. 04기록에 남은 저항짐을 싸서 여덟 번 옮긴 정부
  5. 05기록에 남은 저항그 사람들이 한 일
  6. 06이름과 말을 두고말을 지키려고 모인 사람들
  7. 07빼앗긴 땅과 쌀과 길왜 「조약」이 아니라 「늑약」일까요
  8. 08빼앗긴 땅과 쌀과 길땅의 이름이 바뀌고, 쌀이 배에 실렸어요
  9. 09빼앗긴 땅과 쌀과 길길이 놓이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요
  10. 10이름과 말을 두고한 도시 안의 두 동네
  11. 11이름과 말을 두고시상대 위에서 고개를 숙였어요
  12. 12이름과 말을 두고작은따옴표를 붙이는 까닭
  13. 13광복과 전쟁이 바꾼 살림1945년 8월 15일, 그다음 날부터
  14. 14광복과 전쟁이 바꾼 살림교실이 천막이던 때
  15. 15광복과 전쟁이 바꾼 살림138일 동안 이름을 부른 방송
  16. 16광복과 전쟁이 바꾼 살림피란이 남긴 국수 한 그릇

기록에 남은 저항

5꼭지
01
기록에 남은 저항1919년 3월 1일부터 · 전국과 나라 밖까지

이름이 남은 만세 소리

3·1 운동은 «많은 사람이 만세를 불렀다»로만 남지 않았어요.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가 문서로 남았어요.

서울 서대문독립공원에 있는 3·1독립선언 기념탑이에요. 네모난 돌 받침대 위에 팔을 높이 치켜들고 깃발을 든 사람들의 청동상이 서 있어요. 받침대 앞 검은 판에는 「三·一 獨立宣言記念塔(삼일 독립 선언 기념탑)」이라고 적혀 있어요. 탑 왼쪽 뒤 낮은 검은 벽에는 독립선언서가 빽빽하게 새겨져 있고, 오른쪽 벽에는 사람들을 새긴 조각이 있어요. 뒤로 바위산이 보여요.

서울 서대문독립공원에 있는 3·1독립선언 기념탑이에요. 네모난 돌 받침대 위에 팔을 높이 치켜들고 깃발을 든 사람들의 청동상이 서 있어요. 받침대 앞 검은 판에는 「三·一 獨立宣言記念塔(삼일 독립 선언 기념탑)」이라고 적혀 있어요. 탑 왼쪽 뒤 낮은 검은 벽에는 독립선언서가 빽빽하게 새겨져 있고, 오른쪽 벽에는 사람들을 새긴 조각이 있어요. 뒤로 바위산이 보여요. · 사진 MonasteryInwang (위키미디어 공용) · CC0 · 1919년 당시의 모습이 아니라, 1963년에 탑골공원에 세웠다가 1979년에 철거되고 1992년에 지금 자리로 옮겨 온 기념탑이에요. 원본 사진에서 탑 둘레만 잘라 냈어요 · 내용과 어울리는 참고 사진이에요

한 줄로 말하면만세를 부른 사람들의 이름과 날짜와 장소가 기록으로 남아 있어요.

1,798건옛 기록으로 확인된 3·1 운동 시위 횟수

국사편찬위원회는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었어요. 을 적어 놓은 옛 문서를 모아 하나씩 풀어 놓은 것이에요.

모은 문서는 38,363건이에요. 여기서 27,729건의 정보를 뽑아냈어요. 일본 경찰과 관리가 올린 보고서, 재판 기록, 그리고 『매일신보』·『독립신문』·『신한민보』 같은 그때의 신문이에요.

이 자료로 확인된 시위는 1,798건이에요. 참가한 사람은 82만에서 106만여 명으로 헤아렸어요. 국사편찬위원회는 이 수를 «자료에 확인되는 수치로서, 실제 참가자의 최소 수치에 가깝다»고 밝혔어요. 기록에 안 남은 사람이 더 있다는 뜻이에요.

누가 참여했는지도 기록에 남아 있어요. 학교 학생만이 아니었어요. 서당에 다니던 아이들이 앞장선 곳이 열 곳이 넘었고, 농민이 끼지 않은 곳이 거의 없었어요. 도시의 상인은 함께 가게 문을 닫았고, 노동자·승려·관리도 나섰어요.

구체적인 장면도 남아 있어요. 1919년 3월 4일 평안북도 선천에서는 장날에 맞춰 사람들이 모였어요. 읍내 노동자들이 일손을 놓았고, 조선인 가게는 전부 문을 닫았어요.

평양에서는 3월 4일부터 한 달 동안 상인들이 가게 문을 닫았어요. 사립학교는 전부 쉬었고, 관립·공립학교에 다니던 조선인 학생들은 학교에 가지 않았어요. 가게 문을 닫는 것도, 학교에 가지 않는 것도 의사 표시였어요.

4월 1일 충청남도 천안군 병천 시장에는 약 3,000명이 모였어요. 옛 국기를 흔들며 독립 만세를 외쳤어요. 이날 앞장선 사람 가운데 조인원·김교선·유중권·유중무, 그리고 열일곱 살 유관순이 있었어요.

만세는 나라 안에서만 울린 게 아니에요. 만주의 룽징과 훈춘, 그리고 미국과 연해주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어요. 이 기록들은 지금 누구나 누리집에서 찾아볼 수 있어요. 사건 하나를 누르면 날짜와 지역과 사람 이름이 나와요.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에 사건별로 정리되어 있는 기록이에요
언제어디서기록에 남은 일
1919. 3. 4.평안북도 선천장날 시위 중 읍내 노동자가 일손을 놓고, 조선인 가게가 모두 문을 닫음
1919. 3. 4.~4. 4.평안남도 평양상인들이 가게 문을 닫고, 사립학교는 휴교, 조선인 학생은 등교를 거부함
1919. 4. 1.충청남도 천안 병천 시장약 3,000명이 모여 국기를 흔들며 독립 만세를 외침
02
기록에 남은 저항1919년 2월 27일 밤부터 · 서울 종로

하룻밤에 찍어 이틀 만에 돌린 종이

3월 1일 이전에 먼저 움직인 것은 종이였어요. 그 종이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퍼졌는지가 남아 있어요.

한 줄로 말하면밤새 21,000장을 찍어 이틀 만에 전국으로 돌렸어요.

21,000부1919년 2월 27일 밤부터 찍어 낸 독립선언서

에 이름을 적은 사람은 33명이에요. 천도교에서 15명, 기독교에서 16명, 불교에서 2명이 민족 대표로 서명했어요.

선언서는 1919년 2월 27일 밤부터 21,000부를 인쇄했어요. 그리고 2월 28일과 3월 1일 사이에 종교계 사람들과 학생들의 손을 거쳐 전국으로 뿌려졌어요. 인쇄기 한 대로 하룻밤에 해낸 일이에요.

선언서 끝에는 「공약 삼장」이 붙어 있어요.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지를 세 줄로 적은 약속이에요.

첫째는 «오직 자유로운 정신을 발휘할 것이며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치닫지 말라»예요. 미워하는 마음으로 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둘째는 «마지막 한 사람까지 마지막 한 순간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마음껏 발표하라»예요. 셋째는 «일체의 행동은 무엇보다 질서를 존중하며, 우리의 주장과 태도를 어디까지나 떳떳하고 정당하게 하라»예요.

3월 1일 오후, 민족 대표들은 종로 인사동의 음식점 태화관에 모였어요. 한용운의 말을 듣고 만세를 부른 뒤 일본 경찰에게 붙잡혀 갔어요.

같은 시각 가까운 파고다공원, 지금의 탑골공원에는 학생과 시민 수천 명이 모였어요. 여기서 독립선언서를 소리 내어 읽고 만세를 부르며 거리로 나갔어요.

공약 삼장에 대해서는 한 가지 덧붙일 것이 있어요. 지금 전하는 선언서 끝의 공약 삼장은 나중에 한용운이 더한 것이라고 보는 의견도 있어요. 공공기관의 설명에도 그렇게 적혀 있어요.

03
기록에 남은 저항1908년부터 · 서울 서대문

붉은 벽돌 담장 안에 남은 기록

서울 독립문 옆에 붉은 벽돌 건물이 여러 채 서 있어요. 지금은 표를 끊고 들어가 볼 수 있는 곳이에요.

한 줄로 말하면이름이 여섯 번 바뀐 감옥이 지금은 기록을 보여 주는 곳이 되었어요.

1998. 11. 5.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 문을 연 날

이 자리에 감옥이 들어선 것은 1908년이에요. 처음 이름은 경성감옥이었어요. 문을 연 날짜는 기관마다 4월과 10월로 다르게 적혀 있어서, 여기서는 연도만 적어요.

이름은 그 뒤로 계속 바뀌었어요. 1912년에 서대문감옥, 1923년에 서대문형무소, 1945년에 서울형무소, 1961년에 서울교도소, 1967년에 서울구치소가 되었어요. 한 자리에 붙은 이름이 여섯 개예요.

때 이곳은 몹시 붐볐어요. 시위와 관련해 잡혀 온 사람 1,600여 명을 포함해 3,000여 명이 갇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어요.

유관순은 여기 갇혀서도 가만있지 않았어요. 1920년 3월 1일 오후 2시에 맞춰 이신애·어윤희 같은 사람들과 함께 3·1 운동 한 돌 기념식을 열고 옥중에서 만세를 불렀어요.

유관순은 그해 9월 28일 오전 8시 20분에 열여덟 살로 숨을 거두었어요. 시각까지 기록에 남아 있어요.

감옥은 1987년 11월 15일에 경기도 의왕시로 옮겨 갔어요. 비어 있던 자리는 헐리지 않고 남았어요. 1988년 2월 27일에 사적으로 정해졌고, 면적은 41,312제곱미터예요.

그리고 1998년 11월 5일에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다시 문을 열었어요. 옥사와 부속 건물 가운데 열한 개 동을 남기고 나머지는 헐렸어요.

지금 이곳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건물만이 아니에요. 갇혀 있던 사람들의 신상 기록 카드가 남아 있어서, 이름과 나이와 직업과 사는 곳을 읽을 수 있어요. 이름을 아는 일이 기억하는 일의 시작이에요.

04
기록에 남은 저항1919년 4월 11일부터 · 상하이에서 충칭까지

짐을 싸서 여덟 번 옮긴 정부

나라를 빼앗긴 사람들이 남의 나라 도시에 정부를 세웠어요. 그리고 쫓길 때마다 짐을 싸서 옮겼어요.

한 줄로 말하면정부가 짐을 싸서 여덟 도시를 옮겨 다니며 이십육 년을 버텼어요.

제1조«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 — 1919년 대한민국 임시 헌장

는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세워졌어요. 이 일어난 지 한 달 조금 넘은 때예요.

그 전날인 4월 10일 밤 10시부터 다음 날 오전 10시까지, 상하이의 한 집에 모여 회의를 했어요. 꼬박 열두 시간이에요. 여기서 대한민국 임시 헌장을 만들어 선포했어요.

헌장 제1조는 이래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 임금이 다스리는 나라가 아니라 국민이 주인인 나라로 하겠다는 뜻이에요. 나라 이름을 «대한민국»으로 정한 것도 이때예요.

상하이를 고른 까닭은 그곳이 여러 나라 사람이 드나드는 도시여서, 바깥과 연락하기 좋았기 때문이에요. 임시 정부는 비밀 연락망을 만들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고, 다른 나라를 상대로 우리 사정을 알렸어요.

그러나 한곳에 오래 머물 수 없었어요. 1932년부터 일제의 추적이 심해져 도시를 옮기기 시작했어요. 항저우·전장·창사·광저우·류저우·치장을 거쳐 1940년에 충칭에 닿았어요. 여덟 해 동안 일곱 번을 옮긴 셈이에요.

옮겨 다니는 동안에도 할 일은 했어요. 1940년 9월 17일 충칭에서 성립 전례식을 열었어요. 200명 남짓이 모였고, 총사령은 지청천, 참모장은 이범이었어요.

임시 정부가 만든 임시 헌장은 뒷날 대한민국 헌법으로 이어졌어요. 지금 헌법의 첫머리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적혀 있는 까닭이에요.

서울 서대문구 통일로에는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이 있어요. 2022년 3월에 문을 열었어요. 독립문역에서 걸어서 갈 수 있고, 임시 정부가 옮겨 다닌 길을 따라가며 볼 수 있어요.

임시 정부가 짐을 싸서 옮겨 다닌 길이에요
언제어디로
1919년 4월상하이 — 여기서 세워졌어요
1932년 5월항저우
1935년 11월전장
1937년 12월창사
1938년 10월광저우 → 류저우
1939년 4월치장
1940년 9월충칭 — 여기서 광복을 맞았어요
05
기록에 남은 저항1907년부터 1945년까지 · 나라 안팎

그 사람들이 한 일

독립운동가를 «희생한 사람»으로만 기억하면 반쪽이에요. 이 사람들은 무언가를 **했어요**. 무엇을 했는지 보면 그때 무엇이 필요했는지 보여요.

한 줄로 말하면학교를 세우고, 사전을 만들고, 비행기를 몰았어요. 저마다 다른 일을 했어요.

안창호(1878~1938)는 학교와 단체를 만드는 사람이었어요. 1907년에 비밀 모임인 신민회를 만들고, 평양에 대성학교를 세웠어요. 1913년에는 미국에서 흥사단을 만들었고, 뒤에는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 정부 일을 맡았어요.

이회영(1867~1932)은 재산을 정리해 떠난 사람이에요. 서울의 큰 집안이었는데 논밭과 집을 모두 팔았어요. 급히 파느라 제값도 못 받았다고 해요. 1910년 12월에 식구와 딸린 사람 40여 명이 함께 만주로 떠나 이듬해 1월 삼원보에 닿았어요.

거기서 한 일이 학교예요. 1911년에 경학사를 만들고 신흥강습소를 열었어요. 뒷날 로 이어져 1920년까지 졸업생 3,500여 명을 냈어요. 이회영은 1932년 11월 중국 다롄에서 붙잡혀 그달 17일에 숨을 거두었어요.

남자현(1872~1933)은 1919년에 만주로 가서 서로군정서에서 일했어요. 그러면서 여자교육회를 열 곳 넘게 세웠어요. 여성이 배울 자리를 만든 것이에요. 1932년에는 국제 조사단이 오자 흰 수건에 «한국독립원»이라고 써서 보냈어요.

권기옥(1901~1988)은 비행기를 몰았어요. 평양 숭의여학교 졸업반 때 3·1 운동에 나섰다가 유치장에 갇혔고, 이듬해 상하이로 갔어요. 1923년 12월에 중국 운남 육군항공학교에 들어가 1925년 2월에 졸업했어요. 조선 여성으로는 처음이에요.

윤봉길(1908~1932)은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일본군 행사에 폭탄을 던졌어요. 그해 12월 19일 일본에서 숨을 거두었어요. 스물넷이었어요.

김구(1876~1949)는 이 일들을 잇는 자리에 있었어요. 1931년 10월에 한인애국단을 만들었고, 1940년 9월에 을 세웠어요. 1940년 10월에 임시 정부 주이 되었고, 1945년 11월에 첫 번째로 돌아왔어요.

유관순(1902~1920)은 열일곱에 고향 병천 장터에서 만세 시위를 이끌었어요. 이 사람들이 한 일을 늘어놓고 보면 공통점이 보여요. 학교를 세우고, 글을 가르치고, 기술을 배우고, 조직을 만들었어요. 나라를 되찾은 다음을 생각하며 한 일들이에요.

일곱 사람이 저마다 맡은 일이 달랐어요
누구무엇을 했나요
안창호 (1878~1938)신민회와 대성학교와 흥사단을 만들고, 임시 정부에서 일함
이회영 (1867~1932)재산을 팔아 만주로 가서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세움
남자현 (1872~1933)서로군정서에서 일하고, 여자교육회를 열 곳 넘게 세움
권기옥 (1901~1988)1925년 운남 육군항공학교를 졸업 — 조선 여성 최초의 비행사
윤봉길 (1908~1932)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공원 의거
김구 (1876~1949)한인애국단을 만들고 한국광복군을 세움, 임시 정부 주석
유관순 (1902~1920)1919년 4월 1일 천안 병천 시장의 만세 시위를 이끎

이름과 말을 두고

4꼭지
06
이름과 말을 두고1933년 10월 29일 · 1945년 9월 8일

말을 지키려고 모인 사람들

말은 눈에 보이지 않아서 빼앗기는 줄도 모르게 빼앗겨요. 그래서 말을 지키는 일은 종이에 적는 일부터 시작했어요.

1933년에 나온 「한글 마춤법 통일안」 표지예요. 왼쪽에 가장 큰 글씨로 「東亞日報社(동아일보사)」라고 세로로 적혀 있어요. 가운데 네모 테두리 안에 「한글 마춤법 통일안」이라 적고, 그 왼쪽에 작게 「朝鮮語綴字法統一案」이라 붙였어요. 오른쪽 끝에는 날짜와 함께 「附錄(부록)」이라는 글자가 보여요. 지금 맞춤법과 달리 「마춤법」으로 적혀 있어요.

1933년에 나온 「한글 마춤법 통일안」 표지예요. 왼쪽에 가장 큰 글씨로 「東亞日報社(동아일보사)」라고 세로로 적혀 있어요. 가운데 네모 테두리 안에 「한글 마춤법 통일안」이라 적고, 그 왼쪽에 작게 「朝鮮語綴字法統一案」이라 붙였어요. 오른쪽 끝에는 날짜와 함께 「附錄(부록)」이라는 글자가 보여요. 지금 맞춤법과 달리 「마춤법」으로 적혀 있어요. · 사진 조선어학회 (국립한글박물관 소장 · 위키미디어 공용) · 퍼블릭 도메인 · 조선어학회가 낸 원래 책이 아니라, 같은 해에 동아일보사가 신문 부록으로 찍어 낸 것이에요 · 내용과 어울리는 참고 사진이에요

한 줄로 말하면맞춤법을 정하고 사전을 만들던 원고가 창고에서 다시 나왔어요.

3,569장보물로 정해진 『조선말 큰사전』 원고의 낱장 수

는 1921년에 «조선어연구회»로 시작했어요. 1931년 1월에 이름을 조선어학회로 바꿨고, 뒤인 1949년에 지금의 한글학회가 되었어요.

이 사람들이 먼저 한 일은 맞춤법을 하나로 정하는 것이었어요. 같은 말을 사람마다 다르게 적으면 사전을 만들 수가 없거든요.

정하는 데 3년이 걸렸어요. 회의를 125번 했고, 회의한 시간을 모두 더하면 433시간이에요. 처음 12명으로 시작해 나중에 18명이 되었어요.

그렇게 만든 것이 「한글 맞춤법 통일안」이에요. 1933년 10월 19일에 결정하고, 그해 10월 29일 한글날 기념식에서 발표했어요. 그때 한글날은 10월 29일이었어요. 총론 3항, 각론 7장 63항으로 되어 있어요.

다음 일은 사전이었어요. 『조선말 큰사전』을 만들려고 낱말을 하나하나 모아 원고를 썼어요. 그런데 1942년에 일제가 조선어학회 사람들을 잡아갔어요. 함경도에서 여학생이 기차 안에서 우리말로 이야기하다가 경찰에게 걸린 일이 빌미가 되었어요.

잡혀간 사람은 30명이 넘어요. 기관에 따라 31명으로도, 33명으로도 적혀 있어요. 죄목은 나라를 어지럽혔다는 것이었어요. 이윤재와 한징은 감옥에서 숨졌어요. 남은 사람들은 1945년 8월 17일에 풀려났어요.

그런데 사전 원고가 사라졌어요. 증거물로 경찰이 가져갔거든요. 그러다 1945년 9월 8일, 경성역 조선통운 창고에서 우연히 발견되었어요. 지금의 서울역이에요. 삼 년 만에 되찾은 거예요.

그 원고로 1947년 한글날에 『조선말 큰사전』 첫 권이 나왔고, 1957년에 여섯 권을 다 냈어요. 원고는 2020년 12월에 보물이 되었어요. 모두 14책 3,569장이고, 한글학회와 독립기념관에 나뉘어 있어요.

빼앗긴 땅과 쌀과 길

3꼭지
07
빼앗긴 땅과 쌀과 길1905년 11월 · 서울 덕수궁 둘레

왜 「조약」이 아니라 「늑약」일까요

교과서에도 누리집에도 **을사늑약**이라고 적혀 있어요. 「늑」은 억지로 시킨다는 뜻이에요. 왜 이 글자를 붙일까요.

한 줄로 말하면«조약»이 아니라 «늑약»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분명한 까닭이 있어요.

도장 없음을사늑약 문서에는 고종 황제의 도장이 찍히지 않았어요

1905년 11월, 대한제국의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 사이에 문서 하나가 맺어졌어요. 조약문에 적힌 날짜는 11월 17일이고, 실제로 도장이 찍혀 끝난 것은 그다음 날 낮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어요.

내용은 짧아요. 제1조는 앞으로 한국이 다른 나라와 맺는 일을 일본 외무성이 «감리·지휘»한다는 것이에요. 제2조는 일본을 거치지 않고는 어떤 약속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에요. 한마디로 다른 나라와 이야기할 권리를 가져간 거예요.

그런데 이 문서에는 빠진 것이 있어요. 나라끼리 조약을 맺으려면 순서가 있어요. 임금이 «이 사람에게 맡긴다»고 정식으로 권한을 주어야 하고, 다 된 뒤에 임금이 «그렇게 하자»고 확인해 주어야 해요.

그 두 가지가 모두 없었어요. 공공기관의 설명에는 «전권대신에게 체결 권한을 부여하는 정식 절차도 밟지 않았으며, 광무 황제의 재가와 비준도 거치지 않았다»고 적혀 있어요.

게다가 문서에는 고종 황제의 도장이 찍혀 있지 않아요. 대신 일본 쪽이 외부의 관인, 그러니까 외교를 맡은 부서의 도장을 가져다 찍었어요. 회의에 나온 대신 가운데 가장 윗자리였던 한규설은 반대하다가 회의장에서 끌려 나갔어요.

그리고 그 자리에는 일본 군대가 둘러서 있었어요. 억지로 시킨 것이니까 «늑약»이에요. 우리나라 정부는 지금도 이 문서가 처음부터 효력이 없었다는 입장이에요.

그 뒤는 빠르게 이어졌어요. 1906년 2월 1일에 서울에 가 들어섰어요. 1907년에 고종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국제회의에 이상설·이준·이위종을 보내 이 사실을 알리려 했지만 회의장 안에는 들어가지 못했어요.

일본은 이 일을 구실로 삼았어요. 1907년 7월 20일에 고종을 물러나게 했고, 8월 1일에는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켰어요. 해산 명령을 받은 부대 가운데 일부는 무기고를 열고 맞섰어요. 그리고 1910년 8월 29일, 나라의 주권을 잃었어요.

08
빼앗긴 땅과 쌀과 길1910년대와 1920년대 · 논과 밭과 항구

땅의 이름이 바뀌고, 쌀이 배에 실렸어요

여기서 어려운 제도 이름을 외울 필요는 없어요. 알아야 할 것은 하나예요. **농사짓던 사람들의 살림이 어떻게 달라졌는가.**

군산 내항의 뜬다리 부두예요. 썰물이라 갯벌이 드러났고, 콘크리트 기둥 위에 얹힌 도르래가 쇠사슬로 다리를 매달고 있어요. 뒤로 아치 다리와 고깃배들이 보여요.

군산 내항의 뜬다리 부두예요. 썰물이라 갯벌이 드러났고, 콘크리트 기둥 위에 얹힌 도르래가 쇠사슬로 다리를 매달고 있어요. 뒤로 아치 다리와 고깃배들이 보여요. · 사진 Trainholic (위키미디어 공용) · CC BY-SA 4.0 · 일제 강점기에 쌀을 실어 내려고 만든 시설이 지금까지 남은 것이에요. 여섯 개 가운데 세 개가 남아 있어요 · 내용과 어울리는 참고 사진이에요

한 줄로 말하면땅문서의 이름이 바뀌고, 거둔 쌀이 배에 실려 나갔어요.

0.77 → 0.38석한 사람이 한 해에 먹은 쌀 (1912년 → 1936년)

1910년부터 1918년까지 는 온 나라의 땅을 조사했어요. 겉으로 내건 까닭은 «세금을 공평하게 하고 땅 주인을 지켜 주기 위해서»였어요. 그런데 공공기관의 설명은 이것이 «표면적인 이유»였다고 적고 있어요.

실제 목적은 총독부가 거두는 땅세를 늘리고, 일본 사람이 땅을 갖기 쉽게 만드는 것이었어요. 땅세는 실제로 늘었어요. 조사가 끝난 뒤 총독부의 세금 수입은 두 배쯤 늘었어요.

땅을 가진 사람은 정해진 기간 안에 서류를 내야 했어요. 그런데 서류를 한 장 빠뜨리거나, 도장을 잃어버리거나, 적는 방식이 틀려서 기한을 넘기는 바람에 제 땅을 잃은 사람들이 있었어요.

더 크게 달라진 것은 따로 있어요. 그때까지 우리나라에는 «»이라는 것이 있었어요. 남의 땅이라도 오래 농사를 지어 온 사람은 그 땅에서 농사지을 권리를 사고팔고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었어요. 총독부는 이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어요.

그러자 료가 올랐어요. 땅을 빌려 농사짓는 사람이 거둔 것의 절반까지 내야 하는 일이 흔해졌어요. 오래 부쳐 온 땅에서 쫓겨나는 사람도 생겼어요.

1920년부터는 다른 일이 겹쳤어요. 일본에서는 1918년 8월에 쌀값이 크게 올라 «쌀 소동»이 벌어졌어요. 그래서 총독부는 조선에서 쌀을 더 많이 거두어 일본으로 보내기로 했어요.

쌀은 실제로 더 났어요. 1930년의 쌀 생산량은 1920년보다 약 250만 이 늘었어요. 그런데 일본으로 실려 나간 양은 약 430만 석이 늘었어요. 늘어난 것보다 더 많이 나간 거예요.

그래서 여기 사는 사람들이 먹는 쌀은 줄었어요. 한 사람이 한 해에 먹는 쌀이 1912년에 0.77석이었는데 1936년에는 0.38석이 되었어요. 절반 아래예요. 모자란 것은 만주에서 들여온 잡곡으로 메웠어요. 쌀농사를 짓는 사람이 쌀을 못 먹는 일이 벌어진 거예요.

거둔 쌀은 늘었는데 먹은 쌀은 줄었어요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해거둔 쌀(만 석)일본으로 나간 쌀(만 석)한 사람이 한 해에 먹은 쌀(석)
1912년1,156520.77
1920년1,2701860.63
1928년1,7297420.54
1936년1,7889510.38
09
빼앗긴 땅과 쌀과 길1899년부터 · 노량진에서 신의주까지

길이 놓이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요

우리나라 첫 철도는 일제 강점기보다 먼저 놓였어요. 그런데 그 뒤에 이어 놓인 길들은 사정이 달랐어요.

1925년에 지은 옛 경성역 건물을 앞에서 본 모습이에요. 가운데 지붕에 초록색 둥근 지붕(돔)이 솟아 있고, 그 아래 커다란 반원 창과 둥근 시계가 있어요. 붉은 벽돌 벽에 흰 돌로 테두리를 둘렀고, 양쪽으로 건물이 길게 이어져요. 현관 위에는 「문화역서울 284」라는 글자가 달려 있어요.

1925년에 지은 옛 경성역 건물을 앞에서 본 모습이에요. 가운데 지붕에 초록색 둥근 지붕(돔)이 솟아 있고, 그 아래 커다란 반원 창과 둥근 시계가 있어요. 붉은 벽돌 벽에 흰 돌로 테두리를 둘렀고, 양쪽으로 건물이 길게 이어져요. 현관 위에는 「문화역서울 284」라는 글자가 달려 있어요. · 사진 Wei-Te Wong (위키미디어 공용) · CC BY-SA 2.0 · 옛 사진이 아니라, 지금 서울역 옆에 남아 있는 그 건물을 2015년에 찍은 모습이에요. 원본 사진의 위아래를 잘라 냈어요 · 내용과 어울리는 참고 사진이에요

한 줄로 말하면«기차가 들어와 편해졌다»로 끝내면 빠지는 이야기가 있어요.

2,000만 평경부선·경의선을 놓으며 «철도 용지»로 거두어 간 땅

1899년 9월 18일, 노량진과 제물포 사이 33.2킬로미터에 첫 기차가 다녔어요. 경인선이에요. 이듬해 한강에 철교가 놓이면서 서울과 인천이 이어졌어요.

그다음은 훨씬 길었어요.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선은 1901년에 공사를 시작해 1904년 12월에 끝났고 1905년부터 열차가 다녔어요. 서울과 신의주를 잇는 경의선도 1906년에 전 구간이 열렸어요.

여기서 꼭 함께 봐야 할 것이 있어요. 그 길이 지나간 자리에 살던 사람들이에요. 두 철도를 놓으면서 일본은 «철도 용지»라는 이름으로 2,000만 평의 땅을 거두어 갔어요. 정거장을 짓는다며 남대문 11만 평, 영등포 6만 평, 초량 16만 평을 요구했어요.

땅만이 아니었어요. 소와 말, 곡식, 집, 무덤까지 가져가거나 허물었어요. 기찻길이 들어설 곳에 살던 농민들은 땅을 헐값에 내놓아야 했어요.

일하는 사람도 끌어다 썼어요. 공공기관의 기록은 « 1억 명에 이르는 조선인을 철도 부설 노동자로 동원하여»라고 적고 있어요. 연인원은 하루 일한 사람을 날마다 더해서 센 숫자예요. 품삯은 아주 적었고, 군대를 보내 사람을 끌어오기도 했어요.

그러니 가만있지 않았어요. 사람들은 철로를 받치는 나무를 빼내 감추었고, 공사를 막으려고 모였어요. 충청도 공주 사람들은 마을을 가로지르는 철길을 반대했어요. 그래서 역은 공주가 아니라 한밭, 지금의 대전에 들어섰어요.

일본은 철도를 방해한 사람을 일본군 군사 재판에 넘겨 아주 무겁게 벌했어요. 남대문에서는 수백 명이 한성부 앞에 몰려가 항의한 끝에 정거장을 지을 땅이 11만 평에서 약 5만 평으로 줄기도 했어요.

다 놓인 뒤 그 길로 무엇이 오갔을까요. 실려 나간 것은 쌀과 자원이었고, 실려 다닌 것은 군대였어요. 철도의 끝에는 부산·목포·군산·진남포·원산 같은 항구가 있었고, 거기서 배가 일본으로 떠났어요. 서울역 옆에 남아 있는 1925년에 지은 옛 경성역 건물은 지금 「문화역서울 284」라는 이름으로 전시와 공연을 하는 곳이 되었어요.

10
이름과 말을 두고1914년부터 1945년까지 · 경성과 여러 도시

한 도시 안의 두 동네

그때 서울을 찍은 사진을 보면 번화한 거리가 나와요. 그런데 그 거리는 서울의 한쪽이었어요.

군산 신흥동에 남아 있는 일본식 가옥이에요. 안뜰에서 낮에 올려다본 모습이에요. 이 층 목조 건물에 기와지붕을 얹었고, 이 층에는 유리창을 길게 둘렀어요. 앞뜰에는 둥글게 다듬은 나무와 돌을 놓은 일본식 정원이 꾸며져 있어요.

군산 신흥동에 남아 있는 일본식 가옥이에요. 안뜰에서 낮에 올려다본 모습이에요. 이 층 목조 건물에 기와지붕을 얹었고, 이 층에는 유리창을 길게 둘렀어요. 앞뜰에는 둥글게 다듬은 나무와 돌을 놓은 일본식 정원이 꾸며져 있어요. · 사진 국가유산청 (위키미디어 공용) · 공공누리 제1유형 · 1925년에 지은 집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으로, 국가등록문화유산이에요 · 내용과 어울리는 참고 사진이에요

한 줄로 말하면같은 도시 안에서 가로등이 켜진 동네와 켜지지 않은 동네가 나뉘었어요.

일제 강점기 서울에서는 청계천이 경계였어요. 청계천 북쪽은 조선 사람이 주로 사는 동네였고, 남쪽은 일본 사람이 주로 사는 동네였어요. 북촌과 남촌이라고 불렀어요.

남촌 거리에는 가로등이 섰고, 길이 포장되었고, 은행과 백화점과 상가가 들어섰어요. 북촌 거리에는 그런 시설이 갖춰지지 못했어요. 공공기관의 설명에 그대로 적혀 있는 말이에요.

조선 사람들은 우리 동네에도 길을 놓고 위생 시설을 갖춰 달라고 요구했어요. 그러나 그 요구는 «대부분 일제에 의해 실현되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어요.

행정 구역 이름부터 달랐어요. 일본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은 «정(町)», 조선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은 «동(洞)»으로 갈라 붙였어요. 주소만 봐도 누가 사는 동네인지 알 수 있었어요.

이런 모습은 서울만의 일이 아니었어요. 부산·인천·군산·목포·마산처럼 항구가 열린 도시 대부분이 그랬어요. 군산에 지금도 남아 있는 일본식 집과 옛 은행 건물이 그 자취예요.

이름을 바꾸는 일은 땅에서 사람에게로 옮겨 갔어요. 1940년 2월 11일부터 8월 10일까지 성을 일본식으로 새로 정해 신고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어요. 흔히 이라고 불러요.

처음에는 따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어요. 4월까지 신고한 집이 5퍼센트가 안 되었어요. 그러자 학교를 이용했어요. 아이들을 통해 집에 압박을 넣었어요. 어느 학교에서는 이름을 바꾼 아이에게만 명찰을 달게 했어요. 명찰이 없는 아이는 교실에서 드러났어요.

그래서 뒤 다시 문을 연 학교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이 출부의 이름을 고치는 것이었어요. 도시의 이름도 되돌렸어요. 명치정은 명동이 되었고, 황금정통은 을지로가, 의주통은 의주로가 되었어요. 1946년의 일이에요.

1946년에 일본식 지명을 우리말 이름으로 되돌렸어요
일제 강점기 이름지금 이름
명치정 1·2정목명동1가 · 명동2가
황금정통을지로
의주통 1~2정목의주로1가 · 의주로2가
다옥정다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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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과 말을 두고1936년 8월 9일 · 베를린

시상대 위에서 고개를 숙였어요

올림픽에서 이긴 사람이 웃지 않는 사진이 있어요. 왜 웃지 않았는지 알려면 그가 무엇을 달고 뛰었는지 봐야 해요.

서울 중구 손기정체육공원에 서 있는 「손기정 월계관 기념수」예요. 줄기가 굵은 참나무 한 그루가 하늘로 넓게 가지를 폈고, 밑동 옆에 작은 안내 표지가 서 있어요. 둘레에 산책로와 낮은 울타리가 보여요.

서울 중구 손기정체육공원에 서 있는 「손기정 월계관 기념수」예요. 줄기가 굵은 참나무 한 그루가 하늘로 넓게 가지를 폈고, 밑동 옆에 작은 안내 표지가 서 있어요. 둘레에 산책로와 낮은 울타리가 보여요. · 사진 HappyMidnight (위키미디어 공용) · CC BY-SA 3.0 · 1936년에 받아 온 묘목이 자란 바로 그 나무예요. 「월계관」이라 부르지만 참나무예요

한 줄로 말하면우승자에게 준 나무 화분으로 가슴의 깃발을 가렸어요.

2시간 29분 19초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 기록 — 올림픽 신기록

1936년 8월 9일,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이 1등으로 들어왔어요. 기록은 2시간 29분 19초 2, 올림픽 신기록이었어요. 3등은 남승룡이었어요. 2시간 31분 42초 2였어요.

두 사람 모두 우리나라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이름표에는 «손기테이»라고 적혔고, 가슴에는 일본 국기가 달려 있었어요. 나라를 빼앗긴 상태였으니까요.

손기정은 대회장에서 사인을 부탁받으면 한글로 「손긔졍」이라고 쓰고 그 옆에 「KOREAN」이라고 적었어요. 이름이라도 제대로 남기려 한 거예요.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한 선수에게는 머리에 쓰는 관과 함께 작은 나무 화분을 주었어요. 흔히 월계관이라고 부르지만 실제로 준 것은 참나무 묘목이었어요.

시상대에 선 손기정은 그 화분을 들어 가슴의 일본 국기를 가렸어요. 그리고 고개를 숙였어요. 사진에 그 장면이 그대로 남아 있어요.

이 사진은 우리나라 신문에도 실렸어요. 그런데 신문사들이 사진에서 가슴의 일본 국기를 지우고 실었어요. 1936년 8월 13일과 25일의 일이에요.

그냥 넘어가지 않았어요. 『동아일보』는 8월 29일부터 신문을 낼 수 없게 되었고, 다시 낼 수 있게 된 것은 이듬해 6월이었어요. 신문사 사람 여덟 명이 붙잡혀 갔어요.

그가 받아 온 참나무 묘목은 심어졌고, 지금도 살아 있어요. 서울 중구 손기정로에 있는 손기정체육공원에 «손기정 월계관 기념수»라는 이름으로 서 있어요. 1982년에 서울시 기념물이 되었고, 2024년에는 서울시 자연유산으로 다시 정해졌어요. 아흔 살이 넘은 나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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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과 말을 두고1991년 8월 14일부터 · 지금까지

작은따옴표를 붙이는 까닭

이 꼭지에는 따옴표가 붙은 낱말이 나와요. 그 따옴표를 왜 붙이는지부터 이야기할게요.

전북 익산역 앞 광장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이에요. 한복을 입은 단발머리 소녀가 서서, 한 손을 글이 새겨진 돌비석 위에 얹고 있어요. 어깨에는 작은 새가 앉아 있어요. 옆에는 나무 의자 하나가 비어 있고, 발밑에 꽃다발이 놓여 있어요.

전북 익산역 앞 광장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이에요. 한복을 입은 단발머리 소녀가 서서, 한 손을 글이 새겨진 돌비석 위에 얹고 있어요. 어깨에는 작은 새가 앉아 있어요. 옆에는 나무 의자 하나가 비어 있고, 발밑에 꽃다발이 놓여 있어요. · 사진 웬디러비 (위키미디어 공용) · CC BY-SA 4.0 · 피해자 본인의 사진이 아니라, 기억하려고 세운 조각상이에요. 2017년 광복절에 세운 것으로, 서울 일본대사관 앞에 처음 세운 소녀상(앉은 소녀 곁에 빈 의자)과 달리 선 모습이에요. 원본 사진에서 소녀상 둘레를 잘라 내고 자동차 번호판을 흐리게 했어요 · 내용과 어울리는 참고 사진이에요

한 줄로 말하면낱말에 작은따옴표를 붙이는 것도 사실을 바로잡는 일이에요.

8월 14일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 — 1991년 첫 증언이 있던 날

라고 쓸 때는 두 가지를 반드시 지켜요. 첫째, «위안부» 앞에 «일본군»을 붙여요. 누가 한 일인지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예요. 둘째, «위안부»에 작은따옴표를 붙여요. 이 말이 우리 쪽 표현이 아니라 일본 쪽 표현이라는 것을 밝히고, «위안»이라는 말의 뜻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종군 위안부»라는 말은 쓰지 않아요. «스스로 따라갔다»는 뜻이 숨어 있는 말이기 때문이에요. 낱말 하나를 어떻게 쓰느냐가 사실을 어떻게 전하느냐와 이어져 있어요.

오랫동안 이 일은 이야기되지 못했어요. 그러다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님이 기자들 앞에서 자신이 겪은 일을 처음으로 공개해 말했어요.

이 증언 뒤에 많은 것이 움직였어요. 피해 사실을 알릴 수 있는 신고 전화가 생겼고, 다른 분들의 증언이 이어졌어요. 일본에서도 이 문제를 함께 다루는 시민 단체들이 만들어졌어요. 우리나라만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권리에 관한 문제로 세계에 알려지게 된 거예요.

1992년 1월 8일부터는 서울의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모임이 열리기 시작했어요. 매주 수요일 낮 열두 시에 모여서 라고 불러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어요.

2011년 12월 14일, 수요시위가 1,000번째를 맞은 날에 대사관 앞에 조각상이 세워졌어요. 김운성·김서경 두 사람이 만든 이에요.

그 뒤로 소녀상은 전국 여러 곳에 세워졌어요. 2021년 11월까지 120개가 넘었어요. 나라 밖에도 있어요. 2010년 10월에는 미국 뉴저지의 한 마을에 기림비가 세워졌어요.

나라에서도 날을 정했어요. 8월 14일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이에요. 김학순 님이 처음 증언한 날이에요. 2017년 12월에 법이 바뀌어 국가기념일이 되었고, 2018년 8월 14일에 첫 정부 기념식이 열렸어요.

이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그래서 기억하는 방법이 여럿이에요. 수요일마다 모이는 일, 조각상을 세우는 일, 8월 14일을 달력에 적어 두는 일이에요. 지난 일을 정확한 말로 적어 두는 것이 다음 사람을 지키는 방법이기도 해요.

광복과 전쟁이 바꾼 살림

4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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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과 전쟁이 바꾼 살림1945년 8월 15일 · 그리고 그다음 날부터

1945년 8월 15일, 그다음 날부터

광복이 왜 왔는지를 한 가지로만 말하면 반쪽이에요. 공공기관의 설명은 두 가지를 나란히 적고 있어요.

한 줄로 말하면광복은 남이 가져다준 것도, 우리 힘만으로 된 것도 아니에요. 둘 다예요.

26년임시 정부가 세워진 1919년부터 광복까지 이어진 시간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면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났어요. 그날 우리나라는 을 맞았어요.

국사편찬위원회의 설명은 이렇게 적혀 있어요. 광복은 «연합국의 승리가 가져다 준 결과이기도 하지만, 그 동안 우리 민족이 온갖 희생을 무릅쓰고 일제에 항거하여 꾸준히 전개해 왔던 독립 운동의 결실이기도 하였다»예요.

무엇이 밑거름이 되었는지도 적어 두었어요. 나라 안에서 이어진 독립운동, 만주와 연해주와 중국에서의 무장 투쟁, 의 외교 활동과 의 싸움, 그리고 여러 의거예요. 26년 동안 쉬지 않고 이어진 일들이에요.

광복은 하루 만에 모든 것을 바꾸지 않았어요. 달라진 것은 그다음 날부터 하나씩 나타났어요.

먼저 이름이에요. 다시 문을 연 학교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이 출부의 이름을 고치는 것이었어요. 1946년에는 「조선성명복구령」이 내려져 억지로 바꾸게 했던 이름이 없던 일이 되었어요.

그리고 말과 글이에요. 학교에서 일본어로 된 교과서를 쓰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졌어요. 그런데 대신 쓸 책이 없었어요. 1945년 9월에 학자들이 국사 교과서를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받았고, 초등용 『국사교본』은 1946년 1월에야 전국에 내려갔어요.

쉽지 않았던 까닭이 하나 더 있어요. 광복 무렵 열두 살 이상 가운데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 열에 여덟 가까이였어요. 우리말을 쓸 수 있게 되었어도, 읽고 쓰는 법부터 배워야 했어요.

그래서 광복 뒤 여러 해 동안 마을마다 밤에 공부하는 학교인 야학이 열리고 천막을 친 학교가 생겼어요. 되찾은 말을 실제로 쓰게 되기까지 다시 여러 해가 걸린 거예요. 8월 15일은 끝난 날이 아니라 시작한 날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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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과 전쟁이 바꾼 살림1950년부터 1953년까지 · 부산과 온 나라

교실이 천막이던 때

전쟁은 싸움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아요. 그 시간에도 사람들은 먹고 자고 학교에 갔어요. 그 살림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봐요.

부산 임시수도기념관이에요. 붉은 벽돌로 지은 이 층 집에 기와지붕을 얹었고, 굴뚝이 하나 솟아 있어요. 앞마당에 다듬은 소나무가 서 있고 바닥은 벽돌로 포장되어 있어요.

부산 임시수도기념관이에요. 붉은 벽돌로 지은 이 층 집에 기와지붕을 얹었고, 굴뚝이 하나 솟아 있어요. 앞마당에 다듬은 소나무가 서 있고 바닥은 벽돌로 포장되어 있어요. · 사진 Steve46814 (위키미디어 공용) · CC BY-SA 4.0 · 1926년에 경상남도 도지사가 살라고 지은 집이에요. 전쟁 동안 대통령 관저로 쓰였고 지금은 기념관이에요 · 내용과 어울리는 참고 사진이에요

한 줄로 말하면수도가 부산으로 옮겨 가고, 교실이 천막이 되었어요.

1,023일부산이 임시 수도였던 기간 — 전쟁 1,129일 가운데

6·25 전쟁은 1950년 6월 25일에 시작해 1953년 7월 27일 으로 멈췄어요. 1,129일이에요. 이 가운데 1,023일 동안 대한민국의 수도는 서울이 아니라 부산이었어요.

부산에는 온 사람이 100만 명 넘게 모였어요. 살 집이 있을 리 없었어요. 부산시의 기록은 «산비탈이든 공동묘지든 손바닥만 한 땅만 있으면 군용 텐트나 판자로 집을 지었다»고 적고 있어요.

우암동에는 소를 기르던 막사를 고쳐 사람이 들어가 산 마을이 있었어요. 한 집의 크기가 3평, 그러니까 9.9제곱미터였어요. 교실 한 칸의 십분의 일쯤 되는 넓이예요.

대통령이 지내던 집도 원래 다른 용도였어요. 1926년에 경상남도 도지사가 살라고 지은 2층 집이에요. 전쟁 동안 대통령 관저로 쓰였고, 지금은 임시수도기념관이 되어 누구나 들어가 볼 수 있어요.

학교는 어땠을까요. 건물이 무너지거나 군대가 쓰고 있어서 교실이 모자랐어요. 국가기록원의 기록은 이렇게 적고 있어요. «천막 교실에서 수업을 하고, 교실을 반으로 나누어 광목천으로 가리고 두 학급이 쪼개서 쓰기도 했다.»

한 반에 80명이 넘는 학교가 있었고, 같은 교실을 아침·낮·저녁으로 나누어 세 번 쓰는 3부제 수업도 했어요. 책상과 걸상을 놓을 자리가 없어 바닥에 엎드려 공부하기도 했어요. 이런 교실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1950년대 내내 남아 있었어요.

학교에 다니는 아이도 줄었어요. 1951년 초등학교에 다닐 나이의 아이 중 실제로 다니는 비율은 86.2퍼센트로, 정부가 세워지던 때보다 오히려 떨어졌어요. 부산에서는 1951년 2월에 여러 대학이 하나로 모인 전시연합대학이 문을 열었어요. 천막을 치고 수업을 시작한 거예요.

전쟁으로 다치고 목숨을 잃은 사람이 많았고, 집과 학교와 공장과 철길이 무너졌어요. 그 자리에 오늘 무엇이 서 있는지도 함께 보면 좋겠어요. 부산의 임시수도기념관과 피란 시절 마을은 지금 찾아가 볼 수 있는 곳으로 남아 있어요. 그때의 천막 교실을 기억하는 까닭은, 다시 그런 교실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예요.

국가기록원이 남긴 학교의 모습이에요. 전쟁 때 시작된 이런 교실은 1950년대가 끝나 갈 무렵까지 남아 있었어요
그때 학교기록에 남은 모습
교실천막을 치거나, 한 교실을 광목천으로 갈라 두 학급이 씀
학급 크기한 반에 80명이 넘는 학교도 있었음
수업 시간같은 교실을 세 번 나누어 쓰는 3부제 수업
책상과 걸상놓을 자리가 없어 바닥에 엎드려 공부하기도 함
1951년 취학률초등교육 8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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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과 전쟁이 바꾼 살림1983년 6월 30일부터 138일 동안 · 그리고 지금

138일 동안 이름을 부른 방송

전쟁이 멈춘 지 서른 해가 지난 뒤였어요. 방송국 앞마당이 종이로 뒤덮인 일이 있었어요.

한 줄로 말하면텔레비전을 138일 동안 켜 두고 헤어진 가족을 찾았어요.

453시간 45분「이산가족을 찾습니다」가 138일 동안 방송한 시간

1983년 6월 30일 밤 10시 15분, 한 방송이 시작됐어요. 제목은 「을 찾습니다」였어요. 이산가족은 전쟁 때문에 헤어져 만나지 못하는 가족을 말해요.

처음에는 하루만 하려던 방송이었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몰려왔어요. 결국 138일 동안 이어졌어요. 방송한 시간을 모두 더하면 453시간 45분이에요.

신청한 사람은 약 10만 명이었어요. 방송에 이름이 나온 사람이 53,536명, 그 기간에 실제로 만난 사람이 10,189명이에요. 여의도 방송국을 찾아온 사람은 20만 명쯤 되었어요.

사람들은 종이에 이름과 고향과 헤어진 날을 적어 벽에 붙였어요. 방송국 둘레가 온통 종이였어요.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은 남에게 부탁해 적었어요.

이때 남은 자료는 지금도 보관되어 있어요. 녹화 테이프 463개를 포함해 20,522건이에요. 2015년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 되었어요.

세계기록유산이 된 까닭이 있어요. 전쟁으로 헤어진 가족을 찾는 일을 이렇게 큰 규모로 방송한 사례가 세계에 없었거든요. 한 나라가 겪은 일이 기록으로 남아 모두가 볼 수 있게 된 거예요.

이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통일부에 가족을 찾겠다고 이름을 올린 사람은 134,819명이에요. 그 가운데 살아 계신 분은 33,147명이에요. 2026년 7월 말 기준이에요.

1985년 뒤로 남북이 만나는 자리가 대면 21번, 화상 7번 마련되어 4,912가족이 만났어요. 그러나 2018년 8월 이후로는 멈춰 있어요. 이름을 올려 둔 채 기다리는 사람이 아직 3만 명이 넘는다는 것이 지금 우리가 아는 사실이에요.

국가기록원과 통일부가 밝힌 숫자예요
무엇얼마나
방송 기간1983년 6월 30일부터 138일
방송에 이름이 나온 사람53,536명
방송 기간에 만난 사람10,189명
남은 기록물20,522건 — 2015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아직 기다리는 사람생존 신청자 33,147명 (2026년 7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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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과 전쟁이 바꾼 살림1951년 뒤 · 부산

피란이 남긴 국수 한 그릇

부산에 가면 **밀면**이라는 국수가 있어요. 이 음식이 언제 어떻게 생겼는지에 전쟁이 들어 있어요.

부산 밀면 한 그릇이에요. 스테인리스 대접에 맑은 육수가 담겼고, 가느다란 면 위에 채 썬 오이와 삶은 달걀 반쪽, 무가 놓였어요. 가운데에 붉은 양념장이 한 덩이 얹혀 있어요.

부산 밀면 한 그릇이에요. 스테인리스 대접에 맑은 육수가 담겼고, 가느다란 면 위에 채 썬 오이와 삶은 달걀 반쪽, 무가 놓였어요. 가운데에 붉은 양념장이 한 덩이 얹혀 있어요. · 사진 Minseong Kim (위키미디어 공용) · CC BY-SA 4.0 · 전쟁 때의 사진이 아니라, 지금 부산에서 파는 밀면이에요 · 내용과 어울리는 참고 사진이에요

한 줄로 말하면고향에서 먹던 국수를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다시 만들었어요.

1951년 1월, 많은 사람이 북쪽에서 부산으로 내려왔어요.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부산에 자리를 잡았어요.

그 사람들이 고향에서 먹던 음식 가운데 냉면이 있었어요. 메밀로 면을 뽑아 차게 먹는 국수예요.

그런데 부산에서는 메밀을 구하기 어려웠어요. 대신 흔한 것이 있었어요. 밀가루예요. 전쟁 동안 미군의 구호 물자로 밀가루가 많이 들어왔거든요.

그래서 밀가루로 면을 뽑아 보기로 했어요. 밀가루만으로는 면이 잘 늘어나지 않으니까 고구마 전분을 섞었어요. 그렇게 나온 것이 지금의 부산 밀면이에요.

이름도 처음부터 밀면은 아니었어요. 밀냉면이라고도, 부산 냉면이라고도, 경상도 냉면이라고도 불렀어요. 그러다 밀냉면을 줄인 밀면으로 굳었어요.

음식 이름 하나에 그때 사정이 들어 있는 셈이에요. 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못 먹게 된 것이 무엇이었는지가 재료에 남아 있어요.

밀면은 지금 부산을 대표하는 음식 가운데 하나예요. 부산 사람들이 여름이면 찾아 먹는 국수이고, 다른 지역에서 부산에 가면 먹어 보는 음식이에요.

고향에 가지 못한 사람들이 만든 음식이 칠십 년 넘게 이어져 누구나 먹는 음식이 되었어요. 헤어짐에서 시작한 것이 지금은 함께 먹는 자리가 되었다는 뜻이에요.

더 찾아볼 곳

여기서부터 스스로 더 찾아볼 수 있어요
  •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3·1 운동 시위 하나하나를 날짜와 지역으로 찾아볼 수 있어요. 옛 문서 38,363건에서 뽑아낸 기록이에요. 우리 고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찾을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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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을사늑약 조약문, 대한민국 임시 헌장, 철도를 놓던 때의 기록처럼 그때의 자료를 시대별로 읽을 수 있어요. 초등학생용으로 쉽게 쓴 글도 따로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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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임시 정부가 상하이에서 충칭까지 옮겨 다닌 길을 따라가며 볼 수 있어요. 서울 서대문구에 있고 독립문역에서 걸어갈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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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대문형무소역사관

    1908년에 지어 1987년까지 쓰인 옥사가 남아 있어요. 갇혀 있던 사람들의 신상 기록 카드도 볼 수 있어요. 임시정부기념관과 같은 동네에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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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가기록원 기록으로 보는 우리 역사

    전쟁 중의 천막 교실, 이산가족 찾기 방송, 글을 가르치던 야학처럼 그때의 살림을 사진과 문서로 볼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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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운동을 한 사람의 이름을 넣으면 언제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나와요. 이 호에 나오지 않는 사람도 아주 많이 들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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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 사전

본문에서 밑줄 친 말에 손가락을 올리면 뜻이 떠요
을사늑약
1905년에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가져간 문서예요. 임금의 위임과 확인 없이 억지로 맺어서 「조약」이 아니라 「늑약」이라고 불러요.
통감부
을사늑약 뒤인 1906년에 서울에 설치되어 대한제국의 일을 간섭하던 일본의 기관이에요.
조선총독부
1910년 뒤 우리나라를 다스리던 일본의 통치 기관이에요. 청사를 경복궁 앞에 지었어요.
3·1 운동
1919년 3월 1일부터 전국과 나라 밖에서 일어난 만세 운동이에요. 기록으로 확인된 시위만 1,798건이에요.
기미독립선언서
1919년에 민족 대표 33인이 이름을 적어 펴낸 글이에요. 2월 27일 밤부터 21,000부를 찍어 이틀 만에 전국에 돌렸어요.
대한민국 임시 정부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서 세운 정부예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는 조항을 첫머리에 두었어요.
한국광복군
1940년에 임시 정부가 충칭에서 만든 군대예요. 총사령은 지청천이었어요.
신흥무관학교
이회영을 비롯한 사람들이 만주에 세운 학교예요. 신흥강습소로 시작해 1920년까지 졸업생 3,500여 명을 냈어요.
조선어학회
우리말 맞춤법을 정하고 사전을 만들던 모임이에요. 지금의 한글학회예요. 1942년에 회원들이 잡혀갔어요.
소작
남의 땅을 빌려 농사짓고 거둔 것의 일부를 내는 일이에요. 일제 강점기에 소작료가 절반까지 올랐어요.
도지권
남의 땅이라도 오래 부쳐 온 사람이 그 부치는 권리를 사고팔거나 물려줄 수 있던 권리예요. 총독부가 인정하지 않으면서 없어졌어요.
석
곡식의 양을 세던 단위예요. 한 석은 어른이 한 해에 먹는 쌀의 절반이 조금 넘는 양쯤 돼요.
부잔교
물 높이가 달라져도 배를 댈 수 있게 물에 띄운 다리예요. 뜬다리 부두라고도 해요. 군산에 세 개가 남아 있어요.
연인원
하루 일한 사람 수를 날마다 더해서 센 숫자예요. 같은 사람이 여러 번 세어질 수 있어요.
창씨개명
1940년에 성을 일본식으로 새로 정해 신고하게 한 일이에요. 학교를 통해 아이들에게까지 압박이 갔어요.
일본군 '위안부'
일본군이 전쟁터로 끌고 가 큰 피해를 입힌 여성들을 가리키는 말이에요. 일본 쪽 표현임을 밝히려고 작은따옴표를 붙이고, 앞에 「일본군」을 꼭 씁니다.
수요시위
1992년 1월 8일부터 매주 수요일 낮에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모임이에요. 지금도 이어지고 있어요.
평화의 소녀상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기억하려고 세운 조각상이에요. 2011년 수요시위 1,000회 때 처음 세워졌어요.
광복
1945년 8월 15일에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난 일이에요. 연합국의 승리이면서 동시에 오래 이어 온 독립운동의 결과예요.
피란
전쟁을 피해 살던 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옮겨 가는 일이에요.
임시 수도
전쟁 같은 일로 원래 수도를 쓸 수 없을 때 대신 정부가 머무는 도시예요. 부산이 1,023일 동안 임시 수도였어요.
이산가족
전쟁과 분단 때문에 헤어져 만나지 못하는 가족이에요. 아직 3만 명 넘게 기다리고 있어요.
정전 협정
싸움을 멈추기로 한 약속이에요. 1953년 7월 27일에 맺었어요. 전쟁이 끝난 것과는 다른 상태예요.

지워지지 않은 이름
여기 실은 곳은 대부분 지금도 갈 수 있어요. 서대문형무소역사관과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은 독립문역에서 걸어서 갈 수 있고, 손기정 월계관 기념수는 서울 중구 공원에 서 있어요. 군산에는 쌀을 실어 내던 뜬다리 부두가 남아 있고, 부산에는 임시수도기념관이 있어요. 날짜와 숫자는 국사편찬위원회·국가기록원·국가유산청·통일부 같은 곳이 올려 둔 글에서 그대로 가져왔고, 꼭지마다 있는 「찾아본 곳」을 누르면 그 글로 바로 갈 수 있어요. 기관마다 숫자가 다르게 적힌 것들은 어느 쪽인지 밝혀 두거나 연도만 적었어요.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에 가면 여러분이 사는 고장에서 1919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찾아볼 수 있어요. 여기 모아 둔 것을 읽고 무엇을 골라 적을지는 여러분이 정하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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