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sszine나라의 틀 · 백성의 하루 · 흔들리는 조선 후기 · 새로 들어온 것들

5학년 2학기 · 사회 · 달라지는 시대, 변화하는 생활 모습

먹으로 쓴 나라

『훈민정음』 해례본의 첫 장이에요. 「訓民正音(훈민정음)」이라는 제목 아래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로 시작하는 세종의 글이 세로로 적혀 있고, 왼쪽 끝에 첫 글자 ㄱ의 설명이 시작돼요.

『훈민정음』 해례본의 첫 장이에요. 「訓民正音(훈민정음)」이라는 제목 아래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로 시작하는 세종의 글이 세로로 적혀 있고, 왼쪽 끝에 첫 글자 ㄱ의 설명이 시작돼요. · 사진 세종 등 (위키미디어 공용) · 퍼블릭 도메인 · 지금 남은 해례본의 앞 두 장은 1940년쯤 사람이 다시 써서 채워 넣은 부분이에요

조선은 오백 년 동안 같은 모습이 아니었어요. 새 글자가 생기고, 법이 한 권으로 묶이고, 장터가 서고, 그림 속 주인공이 양반에서 씨름꾼으로 바뀌었어요. 그러다 1899년에는 서울 길 위로 전차가 달렸어요. 무엇이 언제 어떻게 달라졌는지, 지금도 남아 있는 기록과 유물과 장소로 모았어요.

기사 16꼭지

이번 호

열여섯 꼭지. 나라의 틀부터, 개항기 길 위의 전차까지

  1. 01나라의 틀임금이 글자를 새로 만들었어요
  2. 02나라의 틀나라의 모든 일을 한 권에 적었어요
  3. 03나라의 틀궁궐보다 먼저 자리를 정한 두 곳
  4. 04나라의 틀제사 지내는 마당과 공부하는 마당
  5. 05백성의 하루글자 대신 그림이 먼저 나오는 책
  6. 06백성의 하루태어날 때 정해진 자리, 1894년에 없어진 자리
  7. 07백성의 하루늙은 농부에게 물어서 만든 농사책
  8. 08백성의 하루해 그림자와 물과 빗물을 재는 기계
  9. 09흔들리는 조선 후기씨름판 한가운데를 그린 화첩
  10. 10흔들리는 조선 후기이름을 적지 않은 그림들
  11. 11흔들리는 조선 후기읽고 듣고 쓰고 노는 이야기
  12. 12흔들리는 조선 후기닷새마다 서던 장, 손에 쥔 엽전
  13. 13새로 들어온 것들1899년, 서울 길 위에 전차가 달렸어요
  14. 14새로 들어온 것들여학생이 교실에 앉기 시작했어요
  15. 15새로 들어온 것들한글로만 찍은 신문이 나왔어요
  16. 16새로 들어온 것들따로 받던 밥상, 함께 앉은 밥상

나라의 틀

4꼭지
01
나라의 틀1443년 만들고 · 1446년 펴냄

임금이 글자를 새로 만들었어요

글자를 새로 만든 나라는 흔하지 않아요. 더 드문 일은 «왜 만들었는지»와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책으로 남긴 것이에요.

한 줄로 말하면세종이 스물여덟 글자를 새로 만들고, 그 원리를 적은 책을 함께 펴냈어요.

28자1443년에 새로 만든 훈민정음의 글자 수

『세종실록』에 따르면 은 1443년에 임금이 직접 만들었고, 1446년에 세상에 알렸어요. 훈민정음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이에요.

1446년에는 새 글자를 한문으로 풀어 설명한 책도 나왔어요. 이 책의 이름도 『훈민정음』인데, 해설(해례)이 붙어 있어서 흔히 해례본이라고 불러요.

책을 펼치면 첫 장에 세종이 쓴 글이 나와요.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를 딱하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쉽게 익혀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라는 뜻이에요.

여기서 눈여겨볼 말은 «제 뜻을 펴지 못하는»이에요. 글자를 모르면 억울한 일을 당해도 적어서 올릴 수가 없어요. 새 글자는 그 문제를 풀려고 만든 것이었어요.

해례본은 목판으로 찍은 1책이고 모두 33장이에요. 세 부분으로 나뉘어요. 앞쪽은 새 글자의 본문, 가운데는 여덟 명의 집현전 학자가 쓴 해설과 보기, 끝은 정인지가 쓴 서문이에요. 서문 끝에는 1446년에 해당하는 «정통 11년»이 적혀 있어요.

지금 남아 있는 해례본은 한 권뿐이고, 앞의 두 장은 1940년쯤에 사람이 다시 써서 채워 넣은 것이에요.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에 있고 국보로 정해져 있어요.

1997년 10월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올랐어요. 글자를 만든 원리를 글로 남긴 기록이 세계에 거의 없기 때문이에요.

다만 새 글자가 하루아침에 모든 글을 대신한 것은 아니에요. 나라의 공식 문서는 오랫동안 한문으로 썼어요. 한글이 널리 쓰이는 이야기는 조선 후기의 한글 소설 쪽에서 다시 이어져요.

02
나라의 틀1485년 1월 1일부터

나라의 모든 일을 한 권에 적었어요

법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으면 앞뒤가 맞지 않아요. 조선은 그것을 한 권으로 묶는 데 백 년 가까이 걸렸어요.

국립중앙박물관에 펼쳐 놓은 『경국대전』이에요. 왼쪽 면 오른쪽 끝에 「經國大典卷之三(경국대전 권지삼)」과 「禮典(예전)」이라고 적혀 있어요. 과거 시험을 다룬 대목이에요.

국립중앙박물관에 펼쳐 놓은 『경국대전』이에요. 왼쪽 면 오른쪽 끝에 「經國大典卷之三(경국대전 권지삼)」과 「禮典(예전)」이라고 적혀 있어요. 과거 시험을 다룬 대목이에요. · 사진 猫猫的日记本 (위키미디어 공용) · CC BY-SA 4.0 · 1485년에 처음 찍은 책이 아니라 뒤에 다시 찍은 판본(1661년)이에요

한 줄로 말하면나라의 모든 일을 여섯 갈래로 나눠 한 권에 적고, 다시는 고치지 않기로 했어요.

1485년『경국대전』이 최종본으로 시행되기 시작한 해

『』은 조선의 기본 법전이에요. 나라를 어떻게 다스릴지를 적어 둔 책이에요.

만드는 데 아주 오래 걸렸어요. 세조가 통일된 법전을 만들기로 하고 1460년에 나라 살림을 다루는 「호전」을 먼저 완성했어요. 이듬해 「형전」, 1466년에 나머지 네 갈래를 마쳤어요.

그런데 곧바로 펴내지 못했어요. 고칠 곳이 계속 나왔거든요. 1471년에 한 번, 1474년에 또 한 번 고쳐 시행했어요.

마지막으로 손본 것이 1485년 1월 1일부터 시행된 판이에요. 이때 «앞으로 다시는 고치지 않는다»고 못 박았어요. 오늘날 온전히 전해 오는 『경국대전』이 바로 이 판이에요.

책은 여섯 갈래로 나뉘어요. 「이전」은 관리와 관청, 「호전」은 세금과 돈과 땅, 「예전」은 과거 시험과 제사와 혼인, 「병전」은 군대, 「형전」은 벌과 재판과 노비, 「공전」은 길과 다리와 길이·부피·무게를 재는 기준인 도량형이에요.

그 가운데 「형전」에는 아들과 딸에게 재산을 똑같이 나눠 준다는 규정이 들어 있어요. 중국 법을 따라 적은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원래 하던 방식을 그대로 적은 것이에요. 이 이야기는 「태어날 때 정해진 자리」 꼭지에서 이어져요.

법전은 한 번 만들고 끝난 것이 아니에요. 뒤에 『속대전』, 『대전통편』, 『대전회통』이 이어서 나왔어요. 세상이 달라지면 법도 손봐야 했으니까요.

『경국대전』이 나라 일을 나눈 여섯 갈래예요
갈래무엇을 적었나요
이전(吏典)중앙과 지방의 관청, 관리를 뽑고 옮기는 일
호전(戶典)호적·세금·녹봉·돈·창고·땅과 집의 매매
예전(禮典)과거 시험·외교·제사·상복·혼인, 공문서 서식
병전(兵典)군대의 조직과 군사에 관한 일
형전(刑典)형벌·재판·노비, 그리고 재산 상속
공전(工典)도로·교량·도량형·물건 만드는 일
03
나라의 틀1394년부터 · 서울 종로

궁궐보다 먼저 자리를 정한 두 곳

한양으로 도읍을 옮길 때 무엇부터 지었을까요. 임금이 살 궁궐과 함께 자리를 정한 곳이 둘 있었어요.

종묘 정전이에요. 붉은 기둥과 나무 문이 옆으로 끝없이 이어지고, 앞에는 돌을 깔아 놓은 넓은 마당이 있어요. 마당 왼쪽에 한 단 높은 돌길이 곧게 나 있어요.

종묘 정전이에요. 붉은 기둥과 나무 문이 옆으로 끝없이 이어지고, 앞에는 돌을 깔아 놓은 넓은 마당이 있어요. 마당 왼쪽에 한 단 높은 돌길이 곧게 나 있어요. · 사진 Daderot (위키미디어 공용) · 퍼블릭 도메인

한 줄로 말하면도읍을 옮기면서 궁궐과 함께 조상의 사당과 땅·곡식의 제단을 먼저 지었어요.

19칸종묘 정전의 길이 — 열아홉 분의 임금을 모셨어요

는 조선 임금과 왕비의 이름을 적은 나무패인 신주를 모신 사당이에요. 1394년에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짓기 시작해 이듬해에 완성했어요.

종묘의 중심 건물은 정전이에요. 옆으로 아주 긴 한 채인데, 지금은 열아홉 칸이에요. 열아홉 분의 임금과 서른 분의 왕후를 모시고 있어요. 여러 번 늘려 지어서 이렇게 길어졌어요.

정전은 꾸밈이 거의 없어요. 화려한 장식 대신 긴 지붕과 기둥이 끝없이 이어져요. 검소함을 앞세운 의 생각이 건물 모습에 그대로 나타나요.

정전 앞뜰에는 나라에 공을 세운 여든세 명의 위패를 모신 공신당이 있고, 일곱 신을 모신 칠사당도 있어요.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08년에 다시 지었어요.

은 종묘와 짝이 되는 곳이에요. 땅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제단은 동쪽에, 곡식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제단은 서쪽에 두었어요. 태조가 한양에 수도를 정하고 궁궐과 종묘를 지을 때 함께 만들었어요.

제사는 2월과 8월, 그리고 동지와 섣달 그믐에 지냈어요. 가뭄이 들면 비를 비는 기우제를, 풍년을 바라면 기곡제를 여기서 지냈어요. 농사가 곧 나라 살림이던 때였으니까요.

사직단은 1902년에 옮겨졌고, 1940년에는 공원이 되었어요. 지금의 사직공원 자리가 옛 사직단 자리예요.

종묘는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되었어요. 종묘에서 지내는 제사와 그때 연주하는 음악·춤은 2001년에 인류무형유산이 되었어요.

04
나라의 틀1398년부터 · 서울과 온 고을

제사 지내는 마당과 공부하는 마당

조선의 학교에는 마당이 둘 있었어요. 한쪽에서는 제사를 지내고, 한쪽에서는 글을 읽었어요.

영주 소수서원의 강당이에요. 처마 밑 현판에 「白雲洞(백운동)」이라고 쓰여 있어요. 사액을 받기 전 이름이 백운동서원이었거든요. 오른쪽 뒤로 유생들이 지내던 건물이 이어져요.

영주 소수서원의 강당이에요. 처마 밑 현판에 「白雲洞(백운동)」이라고 쓰여 있어요. 사액을 받기 전 이름이 백운동서원이었거든요. 오른쪽 뒤로 유생들이 지내던 건물이 이어져요. · 사진 Jjw (위키미디어 공용) · CC BY-SA 3.0

한 줄로 말하면서울에 성균관, 고을마다 향교, 그리고 선비들이 세운 서원이 있었어요.

서울 명륜동에 문묘와 이 있어요. 문묘는 공자와 여러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에요.

이곳은 크게 두 구역으로 나뉘어요. 제사를 지내는 건물들이 있는 대성전 구역과, 글을 읽는 건물들이 있는 명륜당 구역이에요. 두 구역 사이에는 담장이 있어요.

명륜당 둘레에는 를 공부하는 유생들이 살면서 배우던 동재와 서재가 길게 놓여 있어요. 책을 두던 존경각, 활을 쏘던 육일각, 식당과 창고도 있어요. 학생들이 먹고 자고 공부하던 곳이었어요.

1398년에 처음 세웠는데 1400년에 불탔고, 1407년에 다시 지은 것도 임진왜란 때 탔어요. 지금 있는 건물은 그 뒤에 다시 지은 것이에요.

서울에 성균관이 있었다면 고을마다에는 가 있었어요. 나라가 세운 학교였고, 여기도 제사 지내는 대성전과 글 읽는 명륜당으로 나뉘어요. 건물 짜임이 서울과 같아요.

조선 중기부터는 이 생겼어요. 나라가 아니라 선비들이 세운 학교예요. 1542년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안향의 사당을 세우고, 이듬해 그곳에서 유생들을 가르치며 백운동서원이라 했어요.

1550년에는 풍기군수 이황이 청해서 임금이 «소수서원»이라는 이름을 직접 지어 내려 주었어요. 임금이 이름을 지어 준 첫 서원이에요. 지금 경상북도 영주에 있어요.

서원은 나중에 너무 많아져서 조선 후기에 대부분 없앴어요. 소수서원은 그때 살아남은 마흔일곱 곳 가운데 하나예요. 2019년 7월 6일에는 소수서원을 비롯한 아홉 곳이 「한국의 서원」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되었어요.

2019년 7월 6일에 함께 세계유산이 된 서원들이에요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아홉 곳어디에 있나요
소수서원경북 영주
도산서원 · 병산서원경북 안동
옥산서원경북 경주
남계서원경남 함양
도동서원대구 달성
필암서원전남 장성
무성서원전북 정읍
돈암서원충남 논산

백성의 하루

4꼭지
05
백성의 하루1434년 11월에 펴냄

글자 대신 그림이 먼저 나오는 책

나라가 백성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려 할 때, 글을 못 읽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조선이 고른 답은 그림이었어요.

『삼강행실도』 언해본의 효자 편 한 면이에요. 위쪽에는 한글로 풀어 쓴 글이 세로로 적혀 있고, 그 아래 네모 칸 안에 이야기 장면을 그렸어요. 산기슭 초가집 사이로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이에요.

『삼강행실도』 언해본의 효자 편 한 면이에요. 위쪽에는 한글로 풀어 쓴 글이 세로로 적혀 있고, 그 아래 네모 칸 안에 이야기 장면을 그렸어요. 산기슭 초가집 사이로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이에요. · 사진 국가유산청 (위키미디어 공용) · 공공누리 제1유형 · 그림 위에 한글이 어떻게 얹혔는지 보여 주려고 고른 면이에요

한 줄로 말하면글을 모르는 사람도 볼 수 있도록, 이야기마다 그림을 한 장씩 붙인 책이에요.

『』는 세종 때 만든 윤리책이에요. 삼강은 임금과 신하,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 지켜야 한다고 본 세 가지 도리를 말해요.

만들게 된 계기가 기록에 남아 있어요. 1428년에 진주에 사는 김화가 아버지를 해친 사건이 있었어요. 세종은 이를 탄식하며 집현전 학자에게 책을 만들라고 명했어요.

1432년에 처음 쓴 원고가 완성되고, 판을 새기는 일까지 끝나 1434년 11월에 펴냈어요. 책은 효자·충신·열녀 세 갈래로 나뉘어요.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본받을 만하다고 본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았어요.

책의 짜임이 독특해요. 이야기 하나마다 먼저 그림 한 장이 나오고, 그 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글로 적고, 끝에 시를 붙였어요. 그림이 앞에 오는 이유는 분명해요. 글을 못 읽어도 장면은 볼 수 있으니까요.

성종 때에는 이 책을 한글로 옮겼어요. 한글 번역은 본문 위쪽 여백에 적어 넣었어요. 한 장 안에 그림과 한문과 한글이 함께 놓인 셈이에요.

이때 이야기 수도 줄였어요. 갈래마다 서른다섯 가지씩만 골라 세 권 한 책으로 묶었어요. 널리 나눠 주려면 얇아야 했으니까요.

『삼강행실도』는 15세기부터 19세기까지 약 500년 동안 계속 찍어 냈어요. 중앙에서 찍어 지방에 내려보내면, 지방에서 다시 판을 새겨 백성에게 나눠 주는 방식이었어요.

지금 이 책은 다른 쓸모도 생겼어요. 그림 속에 그때의 옷차림과 집과 살림살이가 그대로 들어 있거든요. 가르치려고 그린 그림이 지금은 그 시대를 보여 주는 자료가 되었어요.

06
백성의 하루조선 내내 · 1894년에 없어짐

태어날 때 정해진 자리, 1894년에 없어진 자리

조선에서 사람의 자리는 스스로 고르는 것이 아니었어요. 그 자리가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는 연도가 분명해요.

한 줄로 말하면신분은 태어날 때 정해졌고,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공식적으로 없어졌어요.

1894년신분 제도가 공식적으로 없어진 해

조선의 은 법으로는 양인과 천인 둘로 나뉘었지만, 실제로는 네 갈래로 나뉘어 있었어요. 양반·중인·상민·천민이에요. 양반은 글을 공부해 관리가 되는 사람들이었어요. 중인은 의학·법률·통역 같은 전문적인 일을 맡았어요. 상민은 대부분 농사를 짓거나 물건을 팔았고, 세금과 군대에서 일하는 의무인 군역의 대부분을 맡았어요. 천민은 대부분 노비였어요.

집안 안에서의 몫은 조선 전기와 후기가 달랐어요. 『』 「형전」에는 아들과 딸에게 재산을 똑같이 나눠 준다는 규정이 있어요. 중국 법을 베낀 것이 아니라 원래 우리나라에서 하던 방식을 적은 것이에요. 제사도 형제자매가 돌아가며 맡는 집이 많았어요.

그런데 조선 후기로 갈수록 달라졌어요. 제사를 큰아들이 도맡게 되면서, 제사에 드는 몫까지 큰아들에게 몰아주는 집이 늘었어요. 똑같이 나누던 상속이 한쪽으로 기울어진 거예요.

집 밖으로 나가는 길은 사정이 또 달라요. 여기서는 조선 전기와 후기의 차이가 크지 않았어요. 관리가 되는 길인 과거 시험은 남성만 볼 수 있었어요. 그러니 여성이 관직에 나가는 길은 처음부터 열려 있지 않았어요. 대부분의 여성은 집안일과 자녀 교육을 맡았어요.

그래서 «조선 전기에는 남녀가 비교적 동등했다»는 말은 집안에서 나눠 가진 몫에 한정해서 봐야 해요. 사회에 나가는 길이 열려 있었다는 뜻은 아니에요. 두 가지는 다른 이야기예요.

조선 후기에는 신분의 벽이 흔들리기 시작했어요. 장사로 돈을 번 사람들이 양반 신분을 사기도 했고, 반대로 가난해져 몰락한 양반도 많았어요. 다만 이것은 «흔들림»이지 «없어짐»은 아니에요.

신분 제도가 공식적으로 없어진 것은 1894년이에요. 그해 때 개혁을 맡은 기구가 «문벌과 양반·상민의 등급을 없애고 귀천에 관계없이 인재를 뽑아 쓴다», «공노비와 사노비에 관한 법을 모두 없애고 사람을 사고파는 일을 금한다»는 내용을 의결했어요.

같은 해에 과거 시험도 없앴어요. 양반이 관리가 되던 통로였으니까요. 다만 법이 바뀌었다고 사람들의 생각이 그날로 바뀐 것은 아니에요. 차별은 그 뒤로도 오래 남았어요.

법으로는 양인과 천인 둘이었지만, 실제로는 이렇게 넷으로 나뉘어 있었어요
신분주로 하던 일
양반유교 책을 공부하고 관리가 되어 나랏일을 맡음
중인의학·법률·통역 같은 전문적인 일
상민농사와 장사 — 세금과 군역의 대부분을 짐
천민대부분 노비 — 나라나 주인에게 매여 일함
07
백성의 하루1429년에 펴냄

늙은 농부에게 물어서 만든 농사책

그때까지 농사 지침서는 중국 책이었어요. 그런데 땅도 날씨도 다른 곳의 책이 여기서 맞을 리가 없었어요.

한 줄로 말하면중국 책을 베끼지 않고, 우리 땅에서 농사짓던 사람들에게 직접 물어 만들었어요.

『』은 1429년에 나라에서 펴낸 농사책이에요. 정초와 변효문 같은 신하들이 임금의 명을 받아 만들었어요.

이 책이 특별한 까닭은 만든 방법에 있어요. 책상에 앉아 중국 농서를 옮겨 적은 것이 아니에요. 각 도를 다스리는 관리인 감사에게 명해 그 지역에서 오래 농사지은 사람들에게 직접 묻게 했어요. 그렇게 모은 경험을 정리해 책으로 묶었어요.

책의 서문에는 그 이유가 적혀 있어요. 땅과 날씨가 다르면 농사짓는 법도 다르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미 나와 있던 중국 농서와 내용이 같을 수가 없었어요.

책은 열 가지 항목으로 나뉘어요. 씨앗을 고르고 보관하는 법, 논밭 가는 법, 그리고 벼·기장·조·수수·콩·팥·보리·밀 같은 곡식을 기르는 법이에요.

벼 기르는 법만 해도 네 가지가 실려 있어요. 논에 씨를 바로 뿌리는 법, 마른논에 뿌리는 법, 모를 따로 길러 옮겨 심는 법, 그리고 산에서 기르는 법이에요. 물 사정과 땅 모양에 따라 골라 쓰라는 뜻이에요.

이 가운데 모를 따로 길러 옮겨 심는 법이 나중에 조선을 크게 바꿔요. 흔히 라고 불러요. 이 이야기는 「닷새마다 서던 장」 꼭지에서 이어져요.

책은 이듬해에 각 도의 감사와 고을 수령들, 서울의 높은 관리들에게 널리 나눠 주었어요. 지방에서 농사를 챙기는 사람들의 지침서가 되라는 뜻이었어요.

『농사직설』은 그 뒤로도 계속 다시 찍혔고, 뒤에 나온 여러 농서가 이 책을 가져다 썼어요. 우리 땅에 맞는 농법을 적은 첫 책이었으니까요.

08
백성의 하루1434년부터 · 서울 한복판

해 그림자와 물과 빗물을 재는 기계

시계가 없으면 시간을 어떻게 알까요. 조선은 오목한 솥 모양의 기계를 만들어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목에 놓았어요.

경복궁 뜰에 놓인 앙부일구예요. 솥처럼 오목한 안쪽에 가로세로 금이 촘촘히 그어져 있고, 가운데에서 뾰족한 바늘이 위로 솟아 있어요. 테두리에는 글자가 빙 둘러 새겨져 있어요.

경복궁 뜰에 놓인 앙부일구예요. 솥처럼 오목한 안쪽에 가로세로 금이 촘촘히 그어져 있고, 가운데에서 뾰족한 바늘이 위로 솟아 있어요. 테두리에는 글자가 빙 둘러 새겨져 있어요. · 사진 Nagyman (위키미디어 공용) · CC BY-SA 2.0 · 보물로 지정된 원래 유물이 아니라, 경복궁에 같은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에요 · 내용과 어울리는 참고 사진이에요

한 줄로 말하면시각과 절기와 빗물을 재는 기계를 만들어 길목과 지방 관청에 놓았어요.

1434년앙부일구와 자격루를 만든 해

는 1434년에 장영실·이천·김조 같은 사람들이 만든 해시계예요. 이름은 «가마솥이 하늘을 우러른다»는 뜻이에요. 시계판이 솥처럼 오목하거든요. 오목한 판에는 금이 그어져 있어요. 세로로 일곱 줄은 시각선이고, 가로로 열세 줄은 계절선이에요. 가운데 뾰족한 바늘의 그림자가 어느 금에 닿는지를 보면 몇 시인지 알 수 있어요.

더 놀라운 것은 절기까지 알 수 있다는 점이에요. 계절이 바뀌면 해의 높이가 달라지고, 그러면 그림자의 길이도 달라져요. 그 길이를 계절선에 대 보면 스물네 절기 중 어디쯤인지 나와요.

『세종실록』에는 글을 모르는 백성을 위해 열두 띠 동물을 그려 넣어 시간을 알게 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글자 대신 쥐·소·호랑이 그림을 보고 시각을 읽으라는 뜻이었어요.

그리고 이 시계는 궁궐 안에만 둔 것이 아니에요. 종로의 혜정교와 앞에도 놓았어요. 누구나 지나가다 볼 수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공동 시계였어요. 물로 시간을 재는 시계도 있었어요. 예요. 1434년에 장영실이 만들었는데, 정해진 시각이 되면 종과 징과 북이 저절로 울리게 만든 물시계였어요.

원리는 이래요. 맨 위 큰 물그릇에 물을 부으면 아래 그릇을 거쳐 길쭉한 물받이 통으로 흘러들어요. 물이 차오르면 그 위에 뜬 잣대가 올라가고, 정해진 눈금에 닿으면 지렛대를 건드려 쇠구슬을 굴려 보내요. 그 구슬이 다른 구슬을 굴리고, 마침내 종과 북을 울려요.

지금 국립고궁박물관에 남아 있는 것은 1536년에 다시 만든 자격루의 일부예요. 구슬이 굴러가던 부분은 없어지고 물통들만 남았어요. 큰 물그릇은 지름 93.5센티미터, 높이 70센티미터예요.

빗물을 재는 기계도 있었어요. 예요. 『조선왕조실록』에는 1441년에 비를 받아 강우량을 쟀고, 이듬해에 재는 방식을 다시 정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나라에서 만들어 각 도를 다스리던 관청인 감영에 내려보냈어요.

그런데 지금 남아 있는 측우기는 딱 하나예요. 금영 측우기라고 하는데, 몸통에 새겨진 글에 따르면 1837년에 만들었고 높이는 한 자 다섯 치, 지름은 일곱 치, 무게는 열한 근이에요. 1915년쯤 나라 밖으로 나갔다가 1971년에 돌아왔어요.

세종 때 만든 세 가지 기계가 각각 재던 것이에요
기계무엇을 재나요어떻게 재나요
앙부일구시각과 절기오목한 판에 비친 바늘 그림자의 자리와 길이
자격루시각흘러든 물의 높이로 잣대를 밀어 올려 종·징·북을 울림
측우기비가 내린 양그릇에 빗물을 받아 깊이를 잼

흔들리는 조선 후기

4꼭지
09
흔들리는 조선 후기18세기 후반 · 조선 후기

씨름판 한가운데를 그린 화첩

그림에 누가 나오는지를 보면 그 시대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겼는지 알 수 있어요. 조선 후기에는 그 주인공이 바뀌었어요.

김홍도의 「씨름」이에요. 가운데에서 두 사람이 맞붙었고, 둘레에 구경꾼들이 둥글게 둘러앉아 있어요. 벗어 놓은 신과 갓이 바닥에 놓였고, 왼쪽에는 엿판을 멘 사람이 서 있어요. 배경은 아예 그리지 않았어요.

김홍도의 「씨름」이에요. 가운데에서 두 사람이 맞붙었고, 둘레에 구경꾼들이 둥글게 둘러앉아 있어요. 벗어 놓은 신과 갓이 바닥에 놓였고, 왼쪽에는 엿판을 멘 사람이 서 있어요. 배경은 아예 그리지 않았어요. · 사진 김홍도 (위키미디어 공용) · 퍼블릭 도메인

한 줄로 말하면그림의 주인공이 임금과 신선에서 씨름꾼과 빨래하는 사람으로 바뀌었어요.

김홍도는 1745년에 태어난 화가예요. 호는 단원이에요. 신선 그림도, 초상화도, 산수화도 그렸지만 로 더 유명해요. 풍속화는 그때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에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김홍도 필 풍속도 화첩』에는 풍속화 스물다섯 점이 들어 있어요. 종이에 먹으로 그리고 옅게 색을 입혔어요. 한 장의 크기는 가로 22.4센티미터, 세로 26.6센티미터예요. 손에 들 만한 크기예요.

김홍도의 그림에는 특징이 있어요. 둘레 배경을 거의 그리지 않아요. 나무도 집도 생략하고 사람만 남겨요. 그래서 보는 사람의 눈이 곧바로 사람들 얼굴로 가요.

얼굴은 대개 둥글고 웃고 있어요. 붓 선은 굵고 힘이 있어요. 씨름판에서 넘어가는 사람, 그것을 보며 입을 벌린 구경꾼, 한쪽에서 엿판을 메고 선 장수가 한 화면에 함께 있어요.

신윤복은 1758년에 태어났어요. 호는 혜원이에요. 아버지 신한평도 화가였고, 자신도 한때 그림을 그리는 관청인 도화서의 화원이었어요.

간송미술관에 있는 『신윤복 필 풍속도 화첩』은 국보예요. 한 첩에 서른 면이 들어 있고, 각 면은 가로 28센티미터, 세로 35센티미터예요. 이 화첩은 일본으로 나갔던 것을 1930년에 전형필이 사들여 돌아왔어요.

두 사람의 그림은 사뭇 달라요. 김홍도가 일하는 사람들을 굵은 선으로 그렸다면, 신윤복은 가늘고 부드러운 선과 고운 색을 썼어요. 그리고 배경을 생략하지 않고 사실적으로 그렸어요.

다루는 이야기도 달라요. 신윤복은 양반들의 놀이와 남녀 사이의 이야기를 많이 그렸어요. 그래서 두 화첩을 나란히 놓으면 조선 후기의 서로 다른 두 세상이 보여요. 두 화첩 모두 지금은 미술 작품이면서 동시에 자료예요. 그때 사람들이 무엇을 입고 무엇을 들고 어떻게 앉았는지가 그림 안에 그대로 남아 있거든요.

같은 시기에 그려진 두 화첩을 나란히 놓아 본 표예요
김홍도 필 풍속도 화첩신윤복 필 풍속도 화첩
지금 어디에국립중앙박물관 (보물)간송미술관 (국보)
몇 점25점1첩 30면
한 장 크기가로 22.4㎝ · 세로 26.6㎝가로 28㎝ · 세로 35㎝
붓 선굵고 힘찬 선가늘고 섬세한 선
배경대부분 생략하고 인물만둘레를 사실적으로 그림
10
흔들리는 조선 후기18세기 후반 ~ 19세기

이름을 적지 않은 그림들

박물관에 걸린 조선 그림에는 대개 그린 사람의 이름과 도장이 있어요. 그런데 이름이 없는 그림들도 아주 많아요.

민화 문자도예요. 굵고 검은 획으로 글자 한 자를 크게 썼고, 그 획 사이사이에 등에 무언가를 진 거북, 붉은 열매, 꽃가지를 그려 넣었어요. 글씨이면서 동시에 그림이에요.

민화 문자도예요. 굵고 검은 획으로 글자 한 자를 크게 썼고, 그 획 사이사이에 등에 무언가를 진 거북, 붉은 열매, 꽃가지를 그려 넣었어요. 글씨이면서 동시에 그림이에요. · 사진 작자 미상 (위키미디어 공용) · 퍼블릭 도메인

한 줄로 말하면누가 그렸는지 적지 않은 그림들이 집집마다 걸렸어요.

는 이름난 화가가 아니라 이름이 남지 않은 사람들이 그린 그림이에요. 궁궐이 아니라 보통 집의 방과 병풍과 문에 붙었어요.

그린 목적도 달라요. 감상하려고만 그린 것이 아니라, 오래 살기를 바라고 복이 들어오기를 바라며 그렸어요. 호랑이와 까치, 모란, 물고기, 책이 쌓인 책장이 자주 나와요.

민화 가운데 라는 갈래가 있어요. 글자 한 자를 크게 쓰고, 그 획 안에 그 글자의 뜻과 얽힌 이야기를 그려 넣은 그림이에요. 글씨이면서 그림인 셈이에요.

가장 많이 그려진 것은 여덟 글자예요. 효(孝)·제(悌)·충(忠)·신(信)·예(禮)·의(義)·염(廉)·치(恥)예요. 에서 지켜야 한다고 본 바른 마음가짐들이에요.

글자마다 함께 그리는 그림이 정해져 있었어요. 획 사이에 잉어나 거북이나 대나무가 들어가요. 글자를 읽지 못해도 그림을 보면 무슨 글자인지 짐작할 수 있었어요.

문자도는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까지 널리 퍼졌어요. 앞에서 본 『』가 나라가 백성에게 내려 준 그림이었다면, 문자도는 사람들이 스스로 그려서 방에 붙인 그림이에요.

같은 가르침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손끝에서 다시 그려졌다는 뜻이에요. 그 과정에서 모양은 훨씬 자유로워졌어요. 획이 구부러지고 늘어나고, 색이 알록달록해졌어요.

11
흔들리는 조선 후기조선 후기 · 지금도 이어짐

읽고 듣고 쓰고 노는 이야기

조선 후기에는 이야기를 즐기는 방법이 여럿이었어요. 글자를 몰라도 이야기를 아는 데는 문제가 없었어요.

안동 하회별신굿탈놀이 공연이에요. 나무를 깎아 만든 탈을 쓰고 흰옷에 갓을 쓴 놀이꾼이 짚으로 엮은 바구니를 들고 한쪽 발을 들어 올리고 있어요. 둘레 돌계단에 관객이 둘러앉았어요.

안동 하회별신굿탈놀이 공연이에요. 나무를 깎아 만든 탈을 쓰고 흰옷에 갓을 쓴 놀이꾼이 짚으로 엮은 바구니를 들고 한쪽 발을 들어 올리고 있어요. 둘레 돌계단에 관객이 둘러앉았어요. · 사진 Bernard Gagnon (위키미디어 공용) · CC0 · 조선 시대 장면이 아니라,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오늘날의 공연 모습이에요 · 내용과 어울리는 참고 사진이에요

한 줄로 말하면글로 읽고, 소리로 듣고, 탈을 쓰고 노는 이야기가 함께 퍼졌어요.

한글 소설이 퍼진 것은 조선 후기예요. 한자를 모르는 사람도 읽을 수 있었으니까요. 빌려 주는 책방도 생기고, 사람들 앞에서 소리 내어 읽어 주는 사람도 있었어요.

는 소리꾼 한 명이 북 치는 고수의 장단에 맞춰 긴 이야기를 엮어 나가는 것이에요. 노래로 부르는 부분을 «창», 말로 하는 부분을 «아니리», 몸짓을 «너름새»라고 해요.

고수는 북만 치는 것이 아니에요. «얼씨구», «좋다», «그렇지» 하고 추임새를 넣어요. 듣는 사람도 따라 해요. 그러니 판소리는 혼자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함께 만드는 자리예요.

처음에는 이야기가 훨씬 많았어요. 판소리 열두 마당이라고 해서 춘향가·심청가·수궁가·흥보가·적벽가에 배비장타령·옹고집타령 같은 것들이 함께 있었어요.

그러다 소리가 점점 길어지고 다듬어지면서 다섯 마당으로 정리됐어요. 춘향가·심청가·수궁가·흥보가·적벽가예요. 지역에 따라 부르는 방식도 나뉘어 동편제·서편제·중고제라고 불러요.

는 탈을 쓰고 마당에서 노는 놀이예요. 안동 하회마을의 하회별신굿탈놀이는 마을을 지키는 성황님께 비는 굿과 함께 했어요. 여덟 마당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내용이에요. 양반 마당과 선비 마당에서는 양반을 대놓고 놀려요. 탈을 쓰면 얼굴이 가려지니까, 평소에 못 하던 말을 할 수 있었어요.

탈은 오리나무를 깎아 만들고 옻칠과 물감을 두세 겹 칠했어요. 등장인물로는 양반·선비·초랭이·이매·부네·백정·할미 같은 이들이 나와요. 이 셋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어요. 판소리는 1964년에, 하회별신굿탈놀이는 1980년에 국가무형유산이 되었어요. 안동에 가면 지금도 탈놀이를 볼 수 있어요.

12
흔들리는 조선 후기조선 후기 · 1678년부터 엽전

닷새마다 서던 장, 손에 쥔 엽전

물건을 사고파는 일이 늘어나려면 두 가지가 필요해요. 팔 물건이 남아야 하고, 값을 치를 돈이 있어야 해요.

상평통보 네 가지예요. 윗줄은 앞면으로 「常平通寶(상평통보)」 네 글자가 위·아래·왼쪽·오른쪽에 하나씩 새겨져 있고, 아랫줄은 뒷면이에요. 모두 가운데에 네모난 구멍이 뚫려 있어요.

상평통보 네 가지예요. 윗줄은 앞면으로 「常平通寶(상평통보)」 네 글자가 위·아래·왼쪽·오른쪽에 하나씩 새겨져 있고, 아랫줄은 뒷면이에요. 모두 가운데에 네모난 구멍이 뚫려 있어요. · 사진 Donald Trung (위키미디어 공용) · CC BY-SA 4.0

한 줄로 말하면농사법이 바뀌어 여유가 생기자 장이 서고, 엽전이 나라의 돈이 되었어요.

1678년상평통보를 만들어 쓰기 시작한 해

조선 후기에 널리 퍼진 농사법이 있어요. 예요. 모를 못자리에서 따로 기른 뒤 논에 옮겨 심는 방법이에요. 『』에도 이미 적혀 있던 방법이지만, 널리 쓰이기까지는 오래 걸렸어요.

이 방법을 쓰면 논의 잡초를 뽑는 데 드는 힘이 크게 줄어요. 모를 줄 맞춰 심으니 잡초를 뽑기가 훨씬 쉽거든요. 같은 식구가 더 넓은 논을 돌볼 수 있게 됐어요. 거두는 양이 늘자 먹고 남는 것이 생겼어요. 남으면 팔 수 있어요. 그래서 물건을 사고파는 자리가 필요해졌어요.

그렇게 생긴 것이 예요. 고을마다 닷새에 한 번씩 장이 섰어요. 장날에는 쌀과 소금과 무명과 그릇이 오갔어요. 이 장에서 저 장으로 물건을 지고 다니는 장사꾼들도 있었어요.

장은 물건만 오가는 곳이 아니었어요. 소식이 오가는 곳이기도 했어요. 이웃 고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값이 어떻게 되는지가 장날에 퍼졌어요.

값을 치르려면 돈이 있어야 해요. 는 1678년부터 만들어 쓴 엽전이에요. «언제나 일정한 값을 지니고 통한다»는 뜻의 이름이에요.

모양은 동그랗고 납작하고, 가운데에 네모난 구멍이 뚫려 있어요. 구멍에 끈을 꿰어 묶어 다녔어요. 앞면에는 «常平通寶(상평통보)» 네 글자가, 뒷면에는 만든 관청의 이름과 숫자가 새겨져 있어요.

숙종은 호조·상평청·훈련도감을 비롯한 일곱 관청에서 한꺼번에 동전을 만들게 했어요. 상평통보는 그 뒤 조선에서 법으로 정한 유일한 돈이 되어 조선 말까지 쓰였어요.

돈이 돌자 새로운 일이 생겼어요. 장사로 돈을 번 사람이 생긴 거예요. 그 가운데 일부는 그 돈으로 양반 을 사기도 했어요. 신분의 벽이 흔들리기 시작한 배경에 이런 변화가 있었어요.

새로 들어온 것들

4꼭지
13
새로 들어온 것들1899년 5월 17일 · 서울

1899년, 서울 길 위에 전차가 달렸어요

전차는 누가 왜 들여왔을까요. 그리고 그것은 사람들의 하루를 어떻게 바꿨을까요. 두 질문의 답이 서로 꽤 멀어요.

높은 데서 내려다본 서울 거리예요. 길 한가운데로 전차 선로가 두 줄 나 있고, 저 앞쪽에 전차 한 대가 서 있어요. 오른쪽에는 기와지붕 가게들이 늘어서 있고,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길을 걸어가요.

높은 데서 내려다본 서울 거리예요. 길 한가운데로 전차 선로가 두 줄 나 있고, 저 앞쪽에 전차 한 대가 서 있어요. 오른쪽에는 기와지붕 가게들이 늘어서 있고,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길을 걸어가요. · 사진 에밀 부르다레 (위키미디어 공용) · 퍼블릭 도메인 · 전차가 처음 달린 1899년이 아니라, 1904년에 프랑스에서 나온 책 『En Corée』에 실린 사진이에요 · 내용과 어울리는 참고 사진이에요

한 줄로 말하면임금의 능 행차 비용을 줄이려고 놓은 전차가, 사람들이 걷던 길의 규칙을 바꿨어요.

2,170명개통 무렵 전차의 하루 평균 승차 인원 — 한성 인구의 1%

고종은 전기와 전차에 관심이 많았어요. 1891년에는 미국 공사에게 전철을 놓는 일을 직접 물어보기도 했어요. 결정적인 계기는 다른 데 있었어요. 1897년 뒤로 고종은 명성황후의 능인 홍릉에 자주 갔는데, 그때마다 비용이 많이 들고 번거로웠어요. 전차를 놓으면 이 문제가 풀리겠다고 생각했어요. 자신이 타지 않을 때는 백성이 타게 해 돈도 벌 수 있겠다고 보았어요.

1898년 2월, 황실이 돈을 대고 미국인 콜브란과 손잡아 한성전기회사를 세웠어요. 첫 사업이 전차를 놓는 일이었어요. 그해 10월 17일에 공사를 시작해 12월 25일에 서대문에서 종로와 동대문을 거쳐 청량리에 이르는 7.5킬로미터 궤도를 끝냈어요.

1899년 5월 17일에 개통식이 열렸어요. 개방차 여덟 대와 황제가 탈 귀빈차 한 대가 나왔어요.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이 선로를 메워 전차가 여러 번 멈춰 서야 했다고 해요.

정작 황제는 전차를 타지 않았어요. 평민이 타는 것과 같은 모양의 차를 탈 수 없다는 관습 때문이었어요. 대신 일반 사람들에게는 인기가 아주 높았어요. 하루 평균 2,170명이 탔는데, 이는 당시 한성 인구의 1퍼센트에 해당해요.

전차를 타려고 먹고살기 위한 일을 쉬는 사람도 있었고, 멀리 시골에서 올라오는 사람도 있었어요. 한 번 타면 내리기 싫어서 서대문과 청량리 사이를 몇 번이나 오간 사람도 있었어요. 그런데 처음부터 환영만 받은 것은 아니에요. 개통 무렵 가뭄이 이어지자 사람들은 전차가 땅의 습기를 빨아들였다고 믿었어요. 개통 일주일 만에 어린이가 치여 숨지는 사고가 나자 원망이 더 커졌고, 전차 두 대가 불타는 일까지 벌어졌어요.

전차 때문에 일감을 잃은 인력거꾼들은 운행을 방해하기도 했어요. 승차 거부 운동이 일어난 적도 있어요. 전차가 진짜 대중교통이 되는 것은 1920년대에 들어서예요. 그래도 길 위의 규칙은 곧 달라졌어요. 탈선과 충돌 사고가 잦아서 길을 걸을 때 긴장해야 했고, 양반처럼 느긋하게 걷는 팔자걸음으로는 궤도가 깔린 시내를 다닐 수 없게 됐어요.

전차 안에서도 달라진 것이 있어요. 표를 가진 승객들 사이에서는 양반과 상민의 구별이 사라졌고, 여자에게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예절이 새로 생겼어요.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규칙이었어요.

도시의 모습도 바뀌었어요. 전차 노선이 생기자 성곽 안에 집을 구할 필요가 없어졌어요. 성으로 둘러싸인 옛 서울의 모습은 이때부터 자취를 잃어 갔어요. 같은 해에 철도도 열렸어요. 1899년 9월 18일에 제물포와 노량진 사이 33.2킬로미터가 개통했어요. 이듬해 한강 철교가 놓이면서 서울과 인천이 완전히 이어졌어요.

14
새로 들어온 것들1885년 · 1886년 · 서울 정동

여학생이 교실에 앉기 시작했어요

조선에도 학교는 있었어요. 성균관과 향교와 서당이에요. 그런데 그 어디에도 여학생 자리는 없었어요.

이화학당 저학년 학생들이에요.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은 학생 수백 명이 잔디 언덕에 줄지어 섰어요. 오른쪽에는 아치 현관이 있는 벽돌 양옥이, 왼쪽에는 기와지붕 한옥이 함께 보여요.

이화학당 저학년 학생들이에요.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은 학생 수백 명이 잔디 언덕에 줄지어 섰어요. 오른쪽에는 아치 현관이 있는 벽돌 양옥이, 왼쪽에는 기와지붕 한옥이 함께 보여요. · 사진 Methodist Episcopal Church (위키미디어 공용) · 퍼블릭 도메인 · 학교를 연 1886년이 아니라 그 뒤에 찍은 사진이에요

한 줄로 말하면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에서 여학생이 처음으로 교실에 앉았어요.

1885년 7월 19일, 아펜젤러라는 미국인 선교사가 서울에 들어왔어요. 그는 집 한 채를 사서 방 두 개를 교실로 고쳤어요. 그해 8월 3일에 학생 두 명을 앉혀 놓고 가르치기 시작했어요.

이듬해인 1886년 6월 8일, 고종이 이 학교에 «배재학당»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어요. 배재는 «인재를 기른다»는 뜻이에요.

여학교는 그보다 조금 늦게 시작됐어요. 1886년 5월 말, 메리 스크랜턴이 조선인 여학생 한 명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했어요. 학생 한 명으로 시작한 이 수업이 이화학당이 되었어요.

이름은 이듬해에 받았어요. 여학교가 생겼다는 소식을 들은 조선 정부가 «이화학당»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어요. 여기서 왜 이름을 나라가 지어 주었는지 눈여겨볼 만해요.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였지만 나라가 이름을 내려 준다는 것은 그 학교를 인정한다는 뜻이었어요.

새 학교에서 배우는 것도 달랐어요. 글을 외우고 뜻을 풀이하는 공부가 아니라 영어·수학·지리·과학 같은 과목을 배웠어요. 책상과 걸상에 앉아 여럿이 한 교실에서 배우는 방식도 새로웠어요.

달라진 것은 교실 안만이 아니에요. 그때까지 여자아이가 집을 떠나 어딘가로 «다니는» 일 자체가 흔치 않았어요. 학교에 간다는 것은 정해진 시각에 집을 나서서 정해진 시각에 돌아온다는 뜻이었어요.

그렇다고 모든 아이가 학교에 간 것은 아니에요. 처음에 학생을 모으는 일부터 어려웠어요. 딸을 낯선 외국인에게 보내려는 집이 드물었거든요. 학교가 늘어나기까지는 시간이 더 걸렸어요.

1896년에 창간된 『독립신문』도 배재학당 안에서 처음 찍혀 나왔어요. 새 학교는 글자와 생각이 퍼져 나가는 자리이기도 했어요.

15
새로 들어온 것들1896년 4월 7일부터

한글로만 찍은 신문이 나왔어요

그때까지 글은 한문이었고, 소식은 관청에서 내려왔어요. 이 두 가지가 한꺼번에 달라진 때가 있었어요.

한 줄로 말하면순 한글로 찍은 민간 신문이 나오고, 누구나 나와 말하는 집회가 열렸어요.

1896. 4. 7.『독립신문』이 처음 나온 날

『독립신문』은 1896년 4월 7일에 창간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신문이에요. 서재필이 중심이 되어 만들었고, 처음 찍어 낸 곳은 정동의 배재학당 안이었어요. 가장 큰 특징은 순 한글로 찍었다는 것이에요. 한자를 섞지 않았어요. 한문을 배우지 못한 사람도 읽을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어요.

크기는 가로 22센티미터, 세로 33센티미터로 지금의 공책만 했어요. 모두 네 면인데, 세 면까지는 한글이고 마지막 한 면은 영문이었어요. 화요일·목요일·토요일, 주 세 번 나왔어요.

영문 면을 둔 까닭도 분명해요. 나라 안 사정을 바깥에 제대로 알리려는 것이었어요. 당시 조선에 대해 잘못 알려진 이야기가 많았거든요.

신문이 생기자 달라진 것이 있어요. 소식이 관청을 거치지 않고도 퍼질 수 있게 된 거예요. 값이 어떻게 되는지, 어느 고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같은 날 여러 사람이 함께 알게 됐어요.

같은 해에 독립협회도 만들어졌어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인 사회·정치 단체예요. 처음에는 독립문을 세우는 일을 내걸고 시작했어요.

독립협회가 연 집회가 만민공동회예요. 여기서는 벼슬이 있든 없든 나와서 자기 생각을 말할 수 있었어요. 나랏일을 두고 사람들이 모여 말한다는 것 자체가 새로운 일이었어요.

관리들과 백성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는 「헌의 6조」라는 요구를 정리해 임금에게 올리기도 했어요. 그 결과 의회와 비슷한 기구를 만들도록 제도를 바꾸는 성과도 얻었어요.

그러나 독립협회는 오래가지 못했어요. 옛 제도로 돌아가자는 쪽의 반발이 컸고, 일부의 과격한 활동을 황제의 권한에 대한 도전으로 본 고종에 의해 해산됐어요.

16
새로 들어온 것들개항 뒤 · 1895년 단발령

따로 받던 밥상, 함께 앉은 밥상

새 물건은 사면 그만이에요. 그런데 밥을 누구와 어떻게 먹느냐 같은 것은 물건이 아니라 습관이라서 훨씬 천천히 달라져요.

한 줄로 말하면밥상 차리는 방식과 머리 모양처럼, 몸에 붙은 습관이 가장 늦게 그러나 크게 달라졌어요.

나라를 열고 오가는 사람이 늘면서 낯선 음식이 들어왔어요. 서양 요리와 중국 요리, 외국 술과 서양 과자 같은 것들이에요. 다만 이런 것을 맛본 사람은 아직 일부 상류층이었어요.

그보다 훨씬 크게 달라진 것은 밥상을 차리는 방식이었어요. 조선에서는 남자들에게 한 사람 앞에 하나씩 작고 둥근 상을 따로 차려 냈어요. 이것을 외상이라고 해요. 남녀가, 또는 양반과 상민이 같은 상에 나란히 앉아 먹는 일은 생각하기 어려웠어요. 서민의 부녀자들은 상에 차려 먹는 일 자체가 드물었어요.

그런데 1885년 앞뒤로 선교사들이 들어오면서 한자리에 나란히 앉아 음식을 나누어 먹는 방식이 시작됐어요.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밥상 모습이 이때부터 조금씩 퍼진 거예요.

도시가 커지면서 생긴 직업도 있어요. 물장수예요. 서울에 사람이 늘자 우물 없는 집에 물을 길어다 주는 일이 생겼어요. 보통 아침에 두 지게, 저녁에 두 지게씩 하루 네 지게를 날랐고, 물값은 보름이나 한 달에 한 번 계산했어요.

옷과 머리도 달라졌어요. 일부 상류층과 개화에 앞선 사람들은 상투를 자르고 양복을 입고 구두를 신었어요. 보통 남자들은 여전히 한복을 입었지만, 저고리 위에 조끼와 마고자를 걸치는 새 습관이 생겼어요.

그러다 1895년 11월 15일(음력)에 이 내려졌어요. 성인 남성의 상투를 자르라는 명령이었어요. 고종도 태자와 함께 머리를 자르고 양복을 입고 나왔어요.

반발이 아주 컸어요. 상투는 단순한 머리 모양이 아니었거든요. 몸은 부모에게 받은 것이라 함부로 상하게 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라고 배워 왔어요. 또 상투는 어른이 되었다는 표시이자 을 드러내는 표시이기도 했어요.

게다가 명성황후가 시해된 지 석 달밖에 지나지 않은 때였어요. 반일 감정이 겹치면서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났어요. 결국 단발은 개인이 알아서 하는 일로 넘어갔어요. 그러니 근대 문물이 들어온 이야기는 «편리해졌다»로만 적을 수 없어요. 무엇이 들어왔는지보다, 그것이 어떤 습관과 부딪쳤는지를 함께 봐야 그때 사람들의 마음이 보여요.

더 찾아볼 곳

여기서부터 스스로 더 찾아볼 수 있어요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훈민정음·앙부일구·측우기·종묘·사직단·소수서원을 이름으로 찾아보면 사진과 설명이 함께 나와요. 어디에 가면 볼 수 있는지 주소도 적혀 있어요.
    바로 가기 ↗

  •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전차가 들어온 이야기, 단발령, 독립신문처럼 개항기에 달라진 생활을 시대별로 읽을 수 있어요.
    바로 가기 ↗

  • 국립중앙박물관

    김홍도와 신윤복의 풍속화, 민화와 문자도, 상평통보 같은 유물을 소장품 검색에서 사진으로 볼 수 있어요.
    바로 가기 ↗

  • 국립한글박물관

    훈민정음이 만들어진 이야기와 한글로 적힌 옛 책들을 모아 둔 곳이에요. 서울 용산에 있어요.
    바로 가기 ↗

  • 국립고궁박물관

    창경궁 자격루 누기와 앙부일구 같은 조선의 과학 기구 실물이 있는 곳이에요. 경복궁 옆에 있어요.
    바로 가기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경국대전·삼강행실도·농사직설·상평통보처럼 이름은 들어 봤지만 잘 모르는 것들을 낱말로 찾아볼 수 있어요.
    바로 가기 ↗

낱말 사전

본문에서 밑줄 친 말에 손가락을 올리면 뜻이 떠요
유교
공자의 가르침을 따르는 생각이에요. 임금과 신하, 부모와 자식, 어른과 아이 사이에 지켜야 할 도리를 중요하게 여겨요.
훈민정음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이에요. 1443년에 만든 스물여덟 글자를 가리키기도 하고, 그 원리를 적은 책을 가리키기도 해요.
경국대전
조선의 기본 법전이에요. 나라 일을 이·호·예·병·형·공 여섯 갈래로 나눠 적었고, 1485년부터 시행했어요.
종묘
조선 임금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에요. 서울 종로에 있고,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되었어요.
사직단
땅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제단이에요. 종묘와 짝을 이뤄 한양을 세울 때 함께 만들었어요.
성균관
조선에서 가장 높은 단계의 교육 기관이에요. 제사를 지내는 대성전 구역과 글을 읽는 명륜당 구역으로 나뉘어요.
향교
나라가 고을마다 세운 학교예요. 성균관처럼 제사 지내는 곳과 공부하는 곳으로 나뉘어요.
서원
나라가 아니라 선비들이 세운 학교예요. 임금이 이름을 지어 내려 준 서원을 사액서원이라고 해요.
삼강행실도
1434년에 펴낸 윤리책이에요. 이야기마다 그림을 한 장씩 붙여, 글을 모르는 사람도 볼 수 있게 했어요.
신분
태어날 때 정해지던 사람의 자리예요. 양반·중인·상민·천민으로 나뉘었고,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공식적으로 없어졌어요.
갑오개혁
1894년에 추진한 개혁이에요. 신분 제도와 노비 제도를 없애고 과거 시험도 폐지했어요.
농사직설
1429년에 펴낸 농사책이에요. 중국 책을 옮기지 않고, 각 지역에서 오래 농사지은 사람들에게 직접 물어 만들었어요.
앙부일구
솥처럼 오목한 해시계예요. 바늘 그림자가 닿는 자리로 시각을, 그림자 길이로 절기를 알 수 있어요.
자격루
물이 차오르는 높이로 시각을 재는 물시계예요. 정해진 시각이 되면 종과 징과 북이 저절로 울렸어요.
측우기
빗물을 그릇에 받아 비가 얼마나 왔는지 재던 기구예요. 지금 남아 있는 것은 금영 측우기 하나뿐이에요.
풍속화
그때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에요. 조선 후기에 김홍도와 신윤복이 특히 잘 그렸어요.
민화
이름이 남지 않은 사람들이 그려 보통 집에 걸던 그림이에요. 복과 오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어요.
문자도
글자 한 자를 크게 쓰고 그 획 안에 얽힌 이야기를 그려 넣은 민화예요. 효·제·충·신·예·의·염·치 여덟 글자가 많아요.
판소리
소리꾼 한 명이 북 치는 고수의 장단에 맞춰 긴 이야기를 엮어 가는 것이에요. 지금은 다섯 마당이 전해요.
탈놀이
탈을 쓰고 마당에서 노는 놀이예요. 얼굴을 가리니까 양반을 놀리는 이야기도 할 수 있었어요.
모내기
모를 못자리에서 따로 기른 뒤 논에 옮겨 심는 농사법이에요. 김매는 품이 줄어 거두는 양이 늘었어요.
장시
고을마다 닷새에 한 번씩 서던 장이에요. 물건만이 아니라 소식도 여기서 오갔어요.
상평통보
1678년부터 만들어 쓴 엽전이에요. «언제나 일정한 값으로 통한다»는 뜻이고, 가운데에 네모난 구멍이 있어요.
개항
다른 나라와 물건을 사고팔 수 있도록 항구를 여는 일이에요. 이 뒤로 낯선 물건과 제도가 들어왔어요.
단발령
1895년에 성인 남성의 상투를 자르라고 내린 명령이에요. 반발이 커서 결국 개인이 알아서 하는 일로 넘어갔어요.

먹으로 쓴 나라
여기 실은 것들은 대부분 지금도 볼 수 있어요. 종묘와 사직단은 서울 한복판에 있고, 소수서원은 영주에 있어요. 앙부일구와 자격루는 국립고궁박물관에, 김홍도의 화첩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어요. 안동에 가면 탈놀이를 직접 볼 수도 있어요. 연도와 크기는 그 유물을 맡고 있는 기관이 올려 둔 글에서 그대로 가져왔고, 꼭지마다 있는 「찾아본 곳」을 누르면 그 글로 바로 갈 수 있어요. 이 호는 그때 사람들이 남긴 것을 모아 둔 곳이에요. 무엇을 눈여겨볼지는 여러분이 정해요.
← 땅속에서 올라온 이야기 지워지지 않은 이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