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sszine선사 시대 · 고조선과 청동기 · 삼국과 가야 · 글씨가 남은 것

5학년 2학기 · 사회 · 유적과 유물로 살펴본 옛사람들의 생활

땅속에서 올라온 이야기

연천 전곡리에서 나온 주먹도끼예요. 돌을 떼어 내 날을 세운 자국이 몸통 둘레로 죽 이어져요.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돼 있어요.

연천 전곡리에서 나온 주먹도끼예요. 돌을 떼어 내 날을 세운 자국이 몸통 둘레로 죽 이어져요.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돼 있어요. · 사진 Ismoon (위키미디어 공용) · CC BY-SA 4.0

옛사람들은 글을 남기지 않았어요. 대신 쓰던 물건과 살던 자리를 땅속에 남겼어요. 강가에서 주운 돌 하나, 불에 탄 쌀 한 줌, 무덤 벽에 그린 사냥 장면. 이 호는 그렇게 땅에서 올라온 것들을 모았어요. 무엇이 어디서 언제 나왔는지까지 적어 두었으니, 그것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여러분이 읽어 내면 돼요.

기사 16꼭지

이번 호

열여섯 꼭지. 강가의 돌도끼부터 가지가 일곱인 칼까지

  1. 01선사 시대강가에서 주운 돌 하나가 세계 지도를 고쳐 그렸어요
  2. 02선사 시대큰물이 지나간 뒤, 무너진 언덕에서 드러났어요
  3. 03선사 시대한강가에 집이 열두 채 모여 있었어요
  4. 04선사 시대빗살무늬 토기 밑이 다 뾰족한 건 아니에요
  5. 05선사 시대바위에 새긴 그림 307점, 한 번에 새긴 게 아니에요
  6. 06고조선과 청동기불에 탄 쌀 한 줌이 알려 준 것
  7. 07고조선과 청동기덮개돌 하나가 길이 7.1미터
  8. 08고조선과 청동기손잡이를 따로 만들어 끼운 칼
  9. 09고조선과 청동기청동판에 새겨 둔, 농사짓는 사람
  10. 10삼국과 가야물길을 내려다가 왕의 무덤 입구가 드러났어요
  11. 11삼국과 가야뚜껑에 산이 스물다섯 개 솟은 향로
  12. 12삼국과 가야무덤 벽에 춤과 사냥을 그려 두었어요
  13. 13삼국과 가야자작나무 껍질에 그린, 하늘을 달리는 말
  14. 14삼국과 가야산등성이를 따라 줄지어 선 무덤들
  15. 15글씨가 남은 것돌기둥 네 면에 새긴 1,775자
  16. 16글씨가 남은 것가지가 일곱인 칼에 금으로 박아 넣은 글자

선사 시대

5꼭지
01
선사 시대경기 연천 · 1978년 발견

강가에서 주운 돌 하나가 세계 지도를 고쳐 그렸어요

1978년, 동두천에 근무하던 미군 병사가 한탄강 유원지에서 돌 한 점을 주웠어요. 그 돌이 교과서를 바꿨어요.

한 줄로 말하면한탄강가에서 주운 주먹도끼 한 점이 세계 구석기 지도를 다시 그리게 했어요.

9,400점전곡리에서 지금까지 나온 석기 (약)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전곡리에는 한탄강이 흘러요. 1978년 이곳에서 한 점이 발견됐어요. 찾은 사람은 동두천에 근무하던 미군 그렉 보웬이에요.

보웬은 미국에서 고고학을 공부하다가 군에 들어온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그 돌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알아봤어요. 돌은 서울대학교 김원룡 교수가 살펴보았고, 프랑스에서 석기를 공부한 정영화가 아슐리안형 주먹도끼라고 확인했어요.

이게 왜 큰일이었을까요? 그때까지 학계에는 모비우스라는 학자의 주장이 퍼져 있었어요. 주먹도끼는 아프리카와 유럽에만 있고 동아시아에는 찍개뿐이라는 주장이었어요. 세계를 두 쪽으로 갈라 놓은 셈이에요.

전곡리의 주먹도끼는 그 선을 지웠어요. 동아시아에도 같은 모양의 주먹도끼가 있었으니까요. 이 발견으로 전곡리는 세계 고고학계에 널리 알려졌어요.

이듬해인 1979년 3월에 첫 이 시작됐고, 지금까지 모두 19차례 조사가 이뤄졌어요. 지금까지 나온 석기는 약 9,400점이에요. 대부분 임진강·한탄강가에서 쉽게 주울 수 있는 규암이나 석영 자갈로 만들었어요.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어요. 전기 구석기 시대라는 의견과 후기 구석기 시대라는 의견이 맞서 왔어요. 다만 아래 깔린 현무암의 나이는 약 50만 년 전 전후로 측정됐어요.

02
선사 시대충남 공주 · 1964년 발굴 시작

큰물이 지나간 뒤, 무너진 언덕에서 드러났어요

1964년 5월, 금강가 언덕이 큰물에 무너졌어요. 드러난 흙벽에서 돌로 만든 연장들이 모습을 보였어요.

공주 석장리에서 나온 중기 구석기 시대 석기 두 점이에요. 큰 긁개와 찍개인데, 자갈돌의 한쪽만 떼어 내 날을 만든 것이 보여요. 연세대학교 박물관에 있어요.

공주 석장리에서 나온 중기 구석기 시대 석기 두 점이에요. 큰 긁개와 찍개인데, 자갈돌의 한쪽만 떼어 내 날을 만든 것이 보여요. 연세대학교 박물관에 있어요. · 사진 Ismoon (위키미디어 공용) · CC BY-SA 4.0

한 줄로 말하면큰물에 무너진 강가 언덕에서 구석기 유적이 드러나, 이 땅의 역사가 훨씬 길다는 것이 밝혀졌어요.

12개석장리에서 확인된 문화층

충청남도 공주시 장기면 석장리예요. 1964년 5월, 큰물이 지나간 뒤 무너진 강가 언덕에서 이 확인됐어요. 바다 높이보다 14.7미터 높은 곳이었어요.

은 그해 11월 22일에 시작해 해마다 한두 달씩 10년 동안 이어졌어요. 땅을 파 내려가 보니 지질 층이 27개나 겹쳐 있었어요. 추운 빙하기에 쌓인 모난돌 층과 빙하기 사이의 따뜻한 때인 간빙기에 쌓인 찰흙 층이 번갈아 있었어요.

은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남은 층이에요. 석장리에서는 맨 아래부터 중석기 문화층까지 모두 12개의 문화층이 확인됐어요. 한자리에서 아주 오랫동안 사람이 살았다는 뜻이에요.

후기 구석기 시대 집터에서는 기둥을 세워 움막을 짓고 화덕을 만들어 불을 피운 흔적이 나왔어요. 사람의 머리털도 여러 개 발견됐어요. 돌날떼기라는 발달한 방법으로 돌날과 밀개, 새기개를 만들었어요.

그 화덕에서 나온 재를 방사성 탄소로 재어 보니 2만 8000년 전이라는 값이 나왔어요. 그 아래층에서는 3만 600년 전이라는 값이 나왔어요.

석장리 발굴은 우리나라에 구석기 연구를 자리 잡게 한 일이었어요. 그전에는 이 땅의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고 잘못 알려져 있었거든요.

03
선사 시대서울 강동 · 지금부터 5000년쯤 전이 중심

한강가에 집이 열두 채 모여 있었어요

구덩이를 파고 기둥을 세워 지은 집이에요. 가운데에는 강돌을 둘러 만든 화덕이 있고, 드나드는 곳은 대개 남쪽을 봤어요.

서울 암사동 유적에 다시 지어 놓은 움집들이에요. 눈이 덮여서 지붕에 얹은 풀과 나뭇가지가 오히려 잘 보여요. 땅을 파고 그 위에 원뿔 모양 지붕을 얹은 모습이에요.

서울 암사동 유적에 다시 지어 놓은 움집들이에요. 눈이 덮여서 지붕에 얹은 풀과 나뭇가지가 오히려 잘 보여요. 땅을 파고 그 위에 원뿔 모양 지붕을 얹은 모습이에요. · 사진 Jtm71 (위키미디어 공용) · CC BY-SA 2.0 KR · 발굴한 집터 옆에 지금 다시 지어 놓은 복원 건물이에요 · 내용과 어울리는 참고 사진이에요

한 줄로 말하면한강가 모래땅을 파고 지은 움집 열두 채가 모여 마을을 이루고 있었어요.

12기암사동에서 확인된 신석기 시대 집터

서울 강동구 암사동은 한강 바로 옆 낮은 언덕이에요. 1925년 큰물로 이 묻힌 층이 드러나면서 널리 알려졌어요.

정식 은 1966년 서울대학교 조사단이 했어요. 이때 둥근 두 채와 , 돌도끼, 그물추, 간돌화살촉이 나왔어요. 1971년부터 1975년까지는 국립중앙박물관 조사단이 네 차례 조사했어요.

그 조사로 신석기 시대 집자리가 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어요. 1983~1984년 조사까지 더해 확인된 집터는 모두 12기예요. 그런데도 파 본 넓이는 전체의 아주 일부예요.

집은 모래땅에 움을 파고 지었어요. 크기는 대체로 한 변이 6미터쯤이에요. 집터 한가운데에는 강돌을 둘러 만든 화덕이 있고, 한쪽에는 드나들기 위한 계단을 만든 곳도 있어요. 출입구는 대개 남쪽을 향했어요.

네 모서리에 기둥을 세우고 들보를 얹어 지붕을 이룬 것으로 보고 있어요. 6호 집자리는 7.9 × 6.6미터로 큰 편인데, 안에 또 둥근 움이 파여 있어요. 마을이 함께 쓰던 창고로 보는 의견이 있어요.

나온 것은 빗살무늬 토기와 석기가 대부분이에요. 새 뼈와 도토리도 조금 나왔어요. 맷돌과 갈돌은 도토리 같은 열매를 갈아 먹은 일과 이어져요. 반달 돌칼, 괭이, 보습, 돌낫처럼 농사에 쓰는 도구도 함께 나왔어요.

집 밖에는 저장 구덩이와 야외 화덕, 돌을 둥글게 쌓은 시설 네 군데가 있었어요. 아래에는 불탄 흙과 숯이 있고 돌 사이에서 토기가 수십 점 나왔어요. 토기를 굽던 한데가마나 공동 화덕으로 보고 있어요.

방사성 탄소로 잰 값은 6200년 전에서 3400년 전 사이에 들어가고, 5000년 전쯤이 중심으로 보여요.

04
선사 시대한반도 곳곳 · 신석기 시대

빗살무늬 토기 밑이 다 뾰족한 건 아니에요

교과서에서 본 뾰족한 밑을 떠올렸다면 절반만 맞아요. 납작한 밑도 있고, 손잡이가 달린 것도 있어요.

손잡이가 두 개 달린 빗살무늬 토기예요. 기사에서 말한 대로 밑이 뾰족하지 않고 둥글게 마무리돼 있어요. 겉면에는 물고기 뼈처럼 생긴 무늬가 비스듬히 그어져 있어요. 국립대구박물관에 있어요.

손잡이가 두 개 달린 빗살무늬 토기예요. 기사에서 말한 대로 밑이 뾰족하지 않고 둥글게 마무리돼 있어요. 겉면에는 물고기 뼈처럼 생긴 무늬가 비스듬히 그어져 있어요. 국립대구박물관에 있어요. · 사진 Ismoon (위키미디어 공용) · CC BY-SA 4.0

한 줄로 말하면빗살무늬 토기는 지역과 시기에 따라 모양이 달라요. 밑이 뾰족한 것만 있는 게 아니에요.

는 신석기 시대에 이 땅에 살던 사람들이 쓴 토기예요. 겉면에 빗처럼 생긴 도구로 찍거나 그어서 무늬를 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에요. 즐문 토기라고도 불러요.

물레를 쓰지 않고 손으로 빚었어요. 도넛 모양 점토 띠를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방법을 주로 썼어요. 구울 때는 특별한 시설 없이 한데에서 굽는 것이 보통이었어요.

굽는 온도는 600~700도쯤이에요. 그래서 대부분 붉은빛이 도는 갈색이나 갈색을 띠어요.

여기서 조심할 것이 있어요. 밑이 뾰족한 토기만 빗살무늬 토기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아요. 밑이 납작한 것은 이른 시기의 남부 지역과 서북·동북 지역에서 유행했어요. 밑이 뾰족하거나 둥근 것은 중서부 지역에서 신석기 말기까지 이어졌어요.

무늬도 지역과 시기에 따라 달라요. 물고기 뼈처럼 생긴 어골문, 점을 줄줄이 찍은 점열문, 물결처럼 흐르는 파상문 같은 것들이 있어요. 무늬를 내는 도구는 보통 나무나 뼈를 깎아 썼고, 드물게 조개껍데기를 쓴 것도 있어요.

쓰임새도 하나가 아니에요. 음식을 끓이거나 담아 두는 그릇, 목이 있는 저장용 항아리가 많아요. 양양 오산리와 서울 암사동에서는 바닥에 구멍이 뚫린 시루 모양 토기도 나왔어요. 음식을 찌는 데 쓴 것으로 보고 있어요.

그래서 토기는 어디서 언제 나온 것인지에 따라 모양도 무늬도 달라요. 한 가지 모습으로 묶어 두기 어려운 물건이에요.

05
선사 시대울산 울주 · 1971년 발견

바위에 새긴 그림 307점, 한 번에 새긴 게 아니에요

고래와 사슴과 호랑이, 그리고 배를 탄 사람들. 대곡천가 깎아지른 절벽에 그림이 빼곡해요.

반구대 암각화가 새겨진 바위 면이에요. 너비 8미터, 높이 3미터쯤 되는 면에 고래와 사슴, 호랑이, 배를 탄 사람들이 빼곡히 새겨져 있어요.

반구대 암각화가 새겨진 바위 면이에요. 너비 8미터, 높이 3미터쯤 되는 면에 고래와 사슴, 호랑이, 배를 탄 사람들이 빼곡히 새겨져 있어요. · 사진 울산암각화박물관 (위키미디어 공용) · CC BY-SA 3.0 · 둘레의 절벽과 물을 지우고 바위 면만 흰 바탕에 도려내어 놓은 사진이에요

한 줄로 말하면절벽 바위에 307점의 그림이 새겨져 있어요. 한 번에 새긴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에 걸쳐 새겨졌어요.

307점2013년 정밀 조사에서 확인된 그림 수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예요. 태화강으로 흘러드는 대곡천 가에 깎아지른 절벽이 있어요. 그중 너비 약 8미터, 높이 약 3미터의 판판한 바위 면에 그림이 몰려 새겨져 있어요. 이런 그림을 라고 해요.

1971년 12월 25일, 천전리 각석을 답사하던 문명대·이융조·김정배가 마을 주민의 제보를 받고 이곳을 찾아냈어요. 1984년 첫 보고서에는 그림이 191점이라고 적혀 있었어요. 그런데 2013년 울산암각화박물관의 정밀 조사에서 307점으로 늘었어요.

그림에서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고래예요. 북방긴수염고래, 혹등고래, 참고래, 귀신고래, 향유고래처럼 종류를 가려낼 수 있을 만큼 특징이 살아 있어요. 새끼를 업은 어미 고래도, 물 위로 뛰어오르는 고래도 있어요.

배도 있어요. 고래 둘레에 새겨진 배에는 17명, 7명, 5명쯤 되는 사람이 타고 있어요. 고래 몸통에 박힌 작살은 줄로 물에 뜨는 도구인 부구와 이어져 있어요. 지금도 쓰이는 고래잡이 도구와 거의 같은 모습이에요.

바위 오른쪽에는 사슴과 호랑이, 표범, 늑대, 여우, 멧돼지 같은 뭍짐승이 많아요. 왼쪽은 고래와 바다거북, 물개, 바닷새 차지예요.

여기서 꼭 알아 둘 것이 있어요. 이 그림은 한 사람이 한 번에 새긴 것이 아니에요. 새긴 자국의 깊이와 너비, 새기는 방법을 살펴보면 크게 네 가지 유형으로 나뉘고, 그림끼리 겹쳐 새겨진 곳도 있어요. 뒤로 갈수록 바다 동물이 줄고 뭍짐승이 늘어나요.

그래서 만들어진 때를 한 해로 못 박기 어려워요. 조개더미에서 나온 동물 뼈와 울산만의 옛 환경을 함께 따져 본 연구가 있어요. 이 연구는 지금으로부터 약 7,000~3,500년 전을 중심 연대로 보고 있어요.

2010년 울산 황성동 조개더미 에서는 작살이 박힌 고래 뼈가 나왔어요. 적어도 7,000년 전부터 이 바다에서 고래를 잡았다는 증거예요.

고조선과 청동기

4꼭지
06
고조선과 청동기충남 부여 · 1974년부터

불에 탄 쌀 한 줌이 알려 준 것

집터 117기가 확인된 커다란 마을이에요. 여기서 나온 곡식 씨앗이 벼농사를 짓던 마을이었음을 알려 줬어요.

부여 송국리 유적에서 나온 불에 탄 쌀이에요. 유리 접시에 담아 돋보기 아래 전시해 두었어요. 까맣게 타지 않고 낟알 모양이 그대로 남아 있어요.

부여 송국리 유적에서 나온 불에 탄 쌀이에요. 유리 접시에 담아 돋보기 아래 전시해 두었어요. 까맣게 타지 않고 낟알 모양이 그대로 남아 있어요. · 사진 HappyMidnight (위키미디어 공용) · CC BY-SA 4.0 · 부여 쌀박물관에 전시된 모습이에요

한 줄로 말하면청동기 시대 마을 자리에서 쌀과 조·밀·기장·콩·팥이 함께 나왔어요.

117기송국리에서 확인된 청동기 시대 집터 (2020년까지)

충청남도 부여군 초촌면 송국리예요. 1974년 돌널무덤 한 기를 수습 조사하면서 널리 알려졌어요. 그 무덤에서 과 청동끌, 간돌검, 돌화살촉, 대롱옥, 굽은옥이 함께 나왔거든요.

정식 학술 조사는 1975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시작해 1987년까지 이어졌어요. 2008년부터는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고고학연구소가 맡아 2020년까지 25차 조사를 했어요.

2020년까지 확인된 집터는 117기예요. 구덩이 107기, 기둥을 땅에 박아 세운 건물 자리 11기, 통나무 담장 20기도 함께 나왔어요. 무덤으로는 돌널무덤과 구덩무덤, 독널무덤이 나왔어요.

집터는 네모난 것과 둥근 것으로 나뉘어요. 둥근 집터는 지름 3~5미터쯤인데, 바닥 한가운데에 길둥근 구덩이와 기둥구멍이 있는 것이 특징이에요. 이런 집터를 송국리식 집터라고 불러요.

큰 건물 자리도 세 곳 나왔어요. 예전에는 마을을 둘러싼 울타리로 봤어요. 그런데 다시 파 보니 19.8 × 3.4미터, 23.4 × 3.4미터 되는 커다란 건물이었어요.

그리고 쌀이 나왔어요. 많은 양의 쌀과 함께 조, 밀, 기장, 콩, 팥 같은 씨앗이 확인됐어요. 곡식과 거두는 도구, 저장 시설, 수많은 집터를 함께 놓고 보면 벼농사를 중심으로 여러 작물을 기르던 마을이었어요.

석기도 많이 나왔어요. 간돌검, 간돌화살촉, 돌도끼, 홈자귀, 돌낫, 갈판, 공이, 가락바퀴, 거푸집이에요. 가락바퀴는 실을 꼬는 도구이고, 거푸집은 청동을 녹여 부어 넣는 틀이에요.

07
고조선과 청동기인천 강화 · 청동기 시대

덮개돌 하나가 길이 7.1미터

굄돌 두 장을 세우고 그 위에 커다란 돌을 얹었어요. 이 돌을 옮겨 얹으려면 몇 사람이 붙어야 했을까요?

강화 부근리 고인돌이에요. 굄돌 두 장을 세우고 그 위에 커다란 덮개돌을 얹은 탁자식이에요. 오른쪽 아래 작은 표지석과 견주어 보면 덮개돌이 얼마나 큰지 짐작돼요.

강화 부근리 고인돌이에요. 굄돌 두 장을 세우고 그 위에 커다란 덮개돌을 얹은 탁자식이에요. 오른쪽 아래 작은 표지석과 견주어 보면 덮개돌이 얼마나 큰지 짐작돼요. · 사진 ChongDae (위키미디어 공용) · CC BY-SA 3.0

한 줄로 말하면덮개돌 하나가 길이 7.1미터예요. 고창·화순·강화 고인돌은 2000년에 세계유산이 됐어요.

7.1m강화 부근리 고인돌 덮개돌의 길이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에 커다란 이 있어요. 1964년 7월 11일에 사적으로 지정됐어요.

크기부터 볼까요. 땅 위로 드러난 높이가 2.6미터, 덮개돌은 길이 7.1미터에 너비 5.5미터예요. 화강암으로 되어 있어요. 지금까지 발견된 북방식 고인돌 가운데 큰 편에 들어요.

받침돌은 긴 굄돌 두 개뿐이고, 방향은 대략 남북이에요. 이 고인돌은 지금까지 겉면 조사만 여러 차례 이뤄졌고 학술 은 아직 하지 않았어요.

부근리 고인돌은 모두 10기인데, 지정되지 않은 128번 고인돌을 뺀 9기가 에 들어 있어요.

강화도 전체로 보면 고인돌은 10여 곳에 150여 기가 있어요. 한 에 평균 14기쯤 모여 떼를 이뤄요. 고려산 일대에만 90기가 넘고, 북쪽의 별립산과 봉천산 일대에 32기가 있어요.

눈여겨볼 점은 고인돌이 산비탈에 몰려 있다는 거예요. 지금은 평지인 곳이 그때는 바닷가나 갯벌이었기 때문으로 보고 있어요.

강화에는 탁자식 고인돌이 유난히 많아요. 탁자식이 많다고 알려진 북한 지역보다도 비율이 높아요.

2000년에는 고창 죽림리·도산리, 화순 효산리·대신리, 강화 부근리·삼거리·오상리의 고인돌군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어요.

08
고조선과 청동기만주와 한반도 · 청동기 시대

손잡이를 따로 만들어 끼운 칼

칼날 아래쪽이 비파라는 악기처럼 불룩해요. 그래서 비파형 동검이라고 불러요.

비파형 동검이에요. 칼날 아래쪽이 둥글게 불룩하고, 가운데 등대에 마디가 도드라져 있어요. 아래쪽 «ㅗ» 자 모양이 따로 만들어 끼운 손잡이예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어요.

비파형 동검이에요. 칼날 아래쪽이 둥글게 불룩하고, 가운데 등대에 마디가 도드라져 있어요. 아래쪽 «ㅗ» 자 모양이 따로 만들어 끼운 손잡이예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어요. · 사진 Gary Lee Todd (위키미디어 공용) · CC BY-SA 4.0 · 사진 설명에 따르면 황해남도 신천군에서 나온 길이 42센티미터짜리예요

한 줄로 말하면칼 몸과 손잡이를 따로 부어 만든 뒤 맞춰 끼우는 방식이 이 칼의 특징이에요.

은 청동기 시대의 무기이자 제사 도구예요. 칼날 아래쪽이 둥글게 배가 불러 비파와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에요.

중국 동북 지방의 요하를 중심으로 한 요령 지방에서 주로 발견되어 «요령식 동검»이라고도 불러요. 광복 전에는 «만주식 동검»이라고 불렀어요.

가장 뚜렷한 특징은 칼날 한가운데 솟은 등대에 마디가 도드라져 있다는 점이에요. 다른 동검들과 구별되는 지점이에요.

또 하나는 만드는 방식이에요. 손잡이는 «ㅗ» 자 모양인데, 손에 쥐는 부분이 속 빈 나팔처럼 생겨서 칼 몸의 끝을 꽂아 맞추게 되어 있어요. 칼 몸과 손잡이를 따로 부어 만든 뒤 조립하는 방식이에요. 중국식 검과 뚜렷이 다른 점이고, 뒤에 나오는 한국식 동검으로 이어져요.

한반도에서는 지금까지 40여 자루가 알려져 있어요. 함경도를 빼면 거의 전역에서 나왔고 서부 지방에 특히 많아요. 돌널무덤이나 에서 나와요.

한반도에서 나온 동검은 이 땅에서 직접 만든 것으로 보고 있어요. 부채 모양 청동도끼의 거푸집이 함께 나오기 때문이에요.

이 동검 문화는 고조선 사회와 깊은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어요. 한반도에 들어온 시기는 서기전 8세기라는 견해부터 서기전 4세기라는 견해까지 여럿이에요.

09
고조선과 청동기대전에서 나온 것으로 전해짐 · 서기전 3세기로 보는 견해

청동판에 새겨 둔, 농사짓는 사람

글로 남긴 기록이 없던 때의 그림이에요. 그래서 이 작은 판 하나가 아주 귀해요.

한 줄로 말하면손바닥만 한 청동판에 따비로 밭을 가는 사람과 곡식을 담는 사람이 새겨져 있어요.

12.8cm농경문 청동기의 너비 (남은 부분)

농경문 청동기는 밭을 가는 모습이 새겨진 청동 예요. 의기는 제사 같은 의식에 쓰는 도구를 말해요. 지금은 아랫부분이 떨어져 나가고 없어요.

남은 크기는 길이 7.3센티미터, 너비 12.8센티미터, 두께 1.5밀리미터예요. 앞뒷면에 광택이 나고 만든 솜씨가 정교해요.

이 은 된 것이 아니에요. 1970년 대전의 한 상인이 고철 수집인에게서 사들인 것이 서울의 골동상을 거쳐 국립중앙박물관에 들어왔어요. 그래서 어느 에서 나왔는지는 알 수 없고, 대전에서 나왔다고만 전해져요.

윗부분 가장자리에는 네모난 구멍이 여섯 개 있어요. 양 끝 두 개가 많이 닳아 있어서 끈을 매달아 오래 썼던 것으로 보여요.

한쪽 면에는 농사 장면이 있어요. 오른쪽에는 두 손으로 농기구를 잡고 한쪽 발을 얹은 사람이 있어요. 끝이 두 가닥으로 갈라진 그 농기구는 지금의 따비와 같은 모양이에요. 그 아래에는 평행선 10개를 가로로 새겨 밭고랑을 나타냈고, 밭고랑 밑에는 괭이를 두 손으로 치켜든 사람이 있어요. 왼쪽에는 아가리가 좁은 항아리 앞에 손을 내민 사람이 있어요.

봄에 밭을 갈고 흙덩이를 부수는 장면과, 가을에 거둔 곡식을 항아리에 담는 장면을 함께 담은 것으로 보고 있어요.

다른 쪽 면에는 두 갈래로 갈라진 나뭇가지 끝에 새가 한 마리씩 마주 보고 앉아 있어요. 새는 예로부터 곡식을 물어다 주고 하늘과 땅을 이어 준다고 여겨졌어요. 마을 어귀에 세우는 솟대와도 이어지는 모습이에요.

그래서 이 청동기는 한 해의 풍년과 마을이 평안하기를 비는 의식에 쓰인 도구로 보고 있어요. 밭을 가는 그림은 이 무렵에 따비와 괭이를 쓰는 농사가 자리를 잡았다는 것을 알려 줘요.

삼국과 가야

5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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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과 가야충남 공주 · 1971년 7월 발견

물길을 내려다가 왕의 무덤 입구가 드러났어요

1971년 7월 5일, 옆 무덤에 스며드는 물을 막으려고 뒤쪽에 도랑을 파다가 입구가 나왔어요. 도굴도 무너짐도 없는 무덤이었어요.

무령왕릉에서 나온 지석 두 장 가운데 왕의 것이에요. 세로줄을 그어 놓고 그 사이에 글자를 새겼어요. 이 글이 무덤 주인이 누구인지 알려 줬어요. 국립공주박물관에 있어요.

무령왕릉에서 나온 지석 두 장 가운데 왕의 것이에요. 세로줄을 그어 놓고 그 사이에 글자를 새겼어요. 이 글이 무덤 주인이 누구인지 알려 줬어요. 국립공주박물관에 있어요. · 사진 ChongDae (위키미디어 공용) · CC BY 4.0

한 줄로 말하면물길을 내려다 왕의 무덤 입구가 드러났어요. 주인이 누구인지 적힌 돌이 안에 있었어요.

4,600여 점무령왕릉에서 나온 유물

충청남도 공주시 송산리 군에는 백제 무덤들이 모여 있어요. 그중 6호 무덤은 벽돌을 쌓아 만든 이에요. 1971년 7월 5일, 이 무덤에 스며드는 물을 막으려고 뒤쪽에 구덩이를 파다가 또 다른 무덤의 입구가 드러났어요.

그게 무령왕릉이에요. 도굴 같은 사람의 손길도, 무너짐 같은 피해도 없이 온전한 상태로 조사된 드문 무덤이에요.

무덤 안 널길 입구에서는 두 장이 나왔어요. 지석은 무덤 주인이 누구인지 적어 둔 돌이에요. 여기에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 62세 되던 계묘년 5월 7일에 돌아가시고, 을사년 8월 12일에 큰 무덤에 예를 갖춰 모시고 이와 같이 기록한다»는 글이 새겨져 있어요.

이 글 덕분에 무령왕이 523년 5월에 세상을 떠나 525년 8월에 무덤에 모셔졌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왕비는 526년 11월에 세상을 떠나 529년 2월에 함께 모셔졌어요. 삼국 시대 무덤 가운데 주인이 정확히 밝혀진 몇 안 되는 무덤이에요.

무덤방은 남북 길이 420센티미터, 동서 너비 272센티미터, 높이 293센티미터예요. 천장은 터널처럼 둥글고, 쌓은 벽돌에는 연꽃무늬가 있어요. 벽에는 등잔을 놓는 작은 구멍과 살창을 두었어요.

나온 은 모두 4,600여 점이에요. 금으로 만든 관 장식, 금귀걸이, 금제 뒤꽂이, 용과 봉황이 장식된 큰 칼, 글씨가 새겨진 팔찌, 돌짐승, 청동 거울 들이에요. 1974년에 국보로 지정된 것만 12종목 17건이에요.

여기서 눈여겨볼 것이 있어요. 무덤 양식은 중국 남조의 벽돌무덤을 따랐고, 함께 나온 도자기도 중국 것이에요. 그런데 왕과 왕비의 나무 관은 일본에서 자라는 금송으로 만들었어요.

어느 한쪽이 다른 쪽보다 앞섰다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백제가 중국과도 일본과도 활발히 오가며 지냈다는 것을 이 무덤 하나가 보여 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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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과 가야충남 부여 · 1993년 12월 12일 출토

뚜껑에 산이 스물다섯 개 솟은 향로

부여 능산리 절터 발굴 현장에서 다른 유물들과 함께 올라왔어요. 뚜껑 하나에 산과 사람과 짐승이 가득해요.

백제 금동대향로예요. 맨 위의 봉황, 그 아래로 겹겹이 솟은 산봉우리, 연꽃 모양 몸체, 그리고 몸체를 떠받친 용이 차례로 보여요. 용의 아랫부분은 사진에서 잘려 있어요.

백제 금동대향로예요. 맨 위의 봉황, 그 아래로 겹겹이 솟은 산봉우리, 연꽃 모양 몸체, 그리고 몸체를 떠받친 용이 차례로 보여요. 용의 아랫부분은 사진에서 잘려 있어요. ·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위키미디어 공용) · CC BY-SA 4.0

한 줄로 말하면뚜껑을 산 모양으로 만들고 그 위에 봉황을 얹었어요. 큰 산봉우리만 스물다섯 개예요.

25개향로 뚜껑에 솟은 큰 산봉우리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에 백제 때의 절터가 있어요. 백제 금동대향로는 1993년 12월 12일 이곳 현장에서 여러 과 함께 나왔어요. 1996년에 국보로 지정됐어요.

생김새를 볼까요. 몸체는 연꽃 봉오리 모양이고, 뚜껑은 산 모양이에요. 맨 위에는 봉황이 앉아 있고, 맨 아래에서는 용이 향로를 떠받치고 있어요.

뚜껑의 산은 5단으로 되어 있어요. 한 단이 5봉우리씩이니 큰 산은 25개예요. 큰 산과 이어지는 봉우리도 49개나 있어서 산이 겹겹이 솟은 모습이에요.

그 산에는 상상의 동물 37마리와 신선 17명이 있어요. 그중 다섯 명은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이에요. 나무 여섯 그루, 향 연기가 빠져나가는 구멍 12개, 산 중턱으로 난 길, 산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 쏟아지는 폭포, 낚시터까지 들어 있어요.

몸체의 연꽃도 5단이에요. 여기에는 신선 두 명과 상상의 동물 25마리가 새겨져 있는데, 물가나 물속에 사는 동물이 많아요.

악기도 가려낼 수 있어요. 둥근 몸통에 기둥이 꽂힌 현악기, 세로로 부는 관악기, 길이가 다른 관을 여러 개 묶은 관악기, 몸통이 불룩한 현악기, 한 손으로 윗판을 든 타악기예요.

이런 향로를 박산향로라고 불러요. 바닷속에 있다는 신선의 산을 닮게 만든 향로예요. 백제 금동대향로는 무령왕릉에서 나온 동탁은잔이나 부여 외리의 무늬벽돌과 견주면 훨씬 다채롭고 세련됐어요. 그래서 7세기 전반에 만든 것으로 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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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과 가야중국 지린성 지안 · 고구려

무덤 벽에 춤과 사냥을 그려 두었어요

동쪽 벽에서 남녀 열네 사람이 줄지어 춤을 춰요. 그 그림에서 무용총이라는 이름이 나왔어요.

중국 지린성 지안에 있는 고구려 무용총, 그 널방 서쪽 벽의 수렵도예요. 말을 탄 무사가 몸을 뒤로 틀어 활을 쏘고, 사슴과 호랑이가 달아나요. 산은 굽이치는 줄로 나타냈어요.

중국 지린성 지안에 있는 고구려 무용총, 그 널방 서쪽 벽의 수렵도예요. 말을 탄 무사가 몸을 뒤로 틀어 활을 쏘고, 사슴과 호랑이가 달아나요. 산은 굽이치는 줄로 나타냈어요. · 사진 작자 미상 (위키미디어 공용) · 퍼블릭 도메인 · 벽면이 떨어져 나간 자리가 흰 얼룩처럼 보여요. 무덤 안의 벽화를 그대로 찍은 것인지, 옮겨 그린 모사도인지는 사진을 올린 곳에 적혀 있지 않아요 · 내용과 어울리는 참고 사진이에요

한 줄로 말하면무덤 널방 벽에 줄지어 춤추는 사람들과 말 타고 사냥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어요.

무용총은 중국 지린성 지안시 우산 남쪽 기슭에 있는 고구려 무덤이에요. 무덤 위에 덮은 흙은 네모난 대 모양이에요. 무덤 안은 앞방과 관을 두는 널방으로 나뉜 두방무덤이에요.

는 두껍게 회를 바른 앞방과 널방의 네 벽, 그리고 널방 천장에 그려져 있어요. 벽 네 모서리에는 기둥과 두공을 그려서 무덤 안이 나무집처럼 보이게 했어요.

널방 북쪽 벽에는 무덤 주인이 손님을 맞는 장면이 있어요. 동쪽 벽에는 남녀 열네 사람이 줄을 지어 노래에 맞춰 춤추는 장면이 있어요. 이 그림에서 «무용총»이라는 이름이 나왔어요.

서쪽 벽에는 수렵도가 있어요. 오르내리는 산에서 말 탄 무사 네 사람이 사냥하는 장면이에요. 몸을 뒤로 틀어 활을 쏘는 사람, 달아나는 사슴과 호랑이가 생생하게 그려져 있어요.

남쪽 벽과 통로 좌우 벽에는 큰 나무가 한 그루씩 그려져 있어요. 천장에는 해와 달과 별, 청룡과 백호, 날아다니는 선인과 기린, 그리고 구름무늬·연꽃무늬·불꽃무늬가 있어요.

벽화는 그때 사람들이 무엇을 입고 무엇을 타고 어떻게 지냈는지 보여 줘요. 글로 남은 기록이 적은 시대라서 이런 그림이 특히 귀해요.

무용총은 2004년에 «고대 고구려 왕국의 수도와 무덤군»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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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과 가야경북 경주 · 1973년 발굴

자작나무 껍질에 그린, 하늘을 달리는 말

더 큰 무덤을 파기 전에 연습 삼아 판 무덤이었어요. 그런데 여기서만 유물이 11,526점 나왔어요.

천마총 말다래에 그려진 천마도예요. 자작나무 껍질이 갈라진 금이 그대로 보이고, 갈기와 꼬리를 세운 흰 말이 가운데를 달려요. 둘레에는 덩굴무늬 띠가 둘려 있어요.

천마총 말다래에 그려진 천마도예요. 자작나무 껍질이 갈라진 금이 그대로 보이고, 갈기와 꼬리를 세운 흰 말이 가운데를 달려요. 둘레에는 덩굴무늬 띠가 둘려 있어요. · 사진 작자 미상 (위키미디어 공용) · 퍼블릭 도메인

한 줄로 말하면자작나무 껍질 말다래에 그린 말 그림과 금관이 한 무덤에서 나왔어요.

11,526점천마총에서 나온 유물

경상북도 경주시 황남동의 공원 대릉원 안에 천마총이 있어요. 원래 이름은 황남동 155호분이에요.

왜 이 무덤을 팠을까요? 원래 목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무덤인 98호분이었어요. 그런데 큰 무덤을 바로 파기는 어려우니, 그보다 작은 무덤을 먼저 파서 경험과 정보를 얻기로 했어요. 그래서 1973년에 155호분을 먼저 했어요.

그런데 155호분도 큰 무덤이었어요. 봉분 높이 12미터 70센티미터, 바닥 지름 47미터예요. 그때까지 발굴한 무덤 가운데 가장 크고 거의 온전해서, 신라 왕릉급 무덤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 줬어요.

무덤 형식은 이에요. 나무로 덧널을 짜고 그 위에 냇돌을 쌓은 뒤 흙을 덮는 방식이에요. 나온 은 모두 11,526점이에요. 장신구가 8,767점, 무기가 1,234점, 말갖춤이 504점, 그릇이 226점이에요.

그중 하나가 예요. 말을 탈 때 흙이 튀지 않도록 안장 양쪽에 늘어뜨리는 판이에요.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말다래가 두 장 나왔어요. 그중 상태가 나은 한 장에 갈기와 꼬리를 세우고 하늘을 달리는 말이 그려져 있었어요.

이 그림을 천마도라고 불러요. 신라에는 고구려나 백제와 달리 를 그린 무덤이 거의 없어요. 그래서 이 그림이 신라 그림을 살펴볼 수 있는 귀한 자료가 됐어요. 그림 속 짐승이 천마가 아니라 기린이라는 견해도 나와 있어요.

무덤 안 나무 널에서는 도 나왔어요. 나뭇가지 모양 세움 장식 3개와 사슴뿔 모양 장식 2개가 관테에 붙어 있어요. 얇은 금판을 여러 겹 오려 만들었기 때문에, 실제로 머리에 쓰고 움직이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고 있어요.

경주의 무덤에서 지금까지 나온 금관은 6점이에요. 금관이 나온 무덤은 대체로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에 만들어졌는데, 그 시기 신라 왕은 네 명뿐이에요. 금관이 왕만 쓴 것이 아니라 왕비나 가족도 썼기 때문으로 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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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과 가야경북 고령 · 가야

산등성이를 따라 줄지어 선 무덤들

대가야의 중심이던 고령에는 지름 20미터가 넘는 무덤이 능선 위에 늘어서 있어요.

고령 지산동 고분군이에요. 능선을 따라 둥근 봉분이 줄지어 솟아 있어요. 풀로 덮여 있어서 언뜻 작은 언덕처럼 보여요.

고령 지산동 고분군이에요. 능선을 따라 둥근 봉분이 줄지어 솟아 있어요. 풀로 덮여 있어서 언뜻 작은 언덕처럼 보여요. · 사진 국가유산청 (위키미디어 공용) · CC BY-SA 4.0

한 줄로 말하면산등성이를 따라 커다란 무덤이 줄지어 있어요. 2023년에 가야고분군이 세계유산이 됐어요.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주산 남쪽 기슭에 고령 지산동 군이 있어요. 1963년 1월 21일에 사적으로 지정됐어요.

무덤은 겉으로 보면 모두 둥근 봉토분이에요. 크기에 따라 지름 20미터가 넘는 대형분, 10미터 안팎의 중형분, 그보다 작은 소형분으로 나뉘어요. 대형분은 주로 능선 위쪽에, 중형분은 능선 중간 아래쪽에 모여 있어요.

1976년에 봉분이 뚜렷한 무덤 72기에 번호를 붙였어요. 그 뒤 1977년에 44호분과 45호분을, 1978년에 32~35호분을 했어요.

44호분은 긴 쪽 27미터, 짧은 쪽 25미터 되는 타원형 봉분이고 높이는 3.6미터쯤이에요. 가운데에 길이 9.4미터, 너비 1.75미터의 길쭉한 돌덧널을 두고, 그 옆으로 딸린 돌덧널을 «ㅜ» 자 모양으로 놓았어요.

무덤에서는 많은 토기와 함께 금동관, 갑옷과 투구, 긴 칼, 꾸미개가 나왔어요. 32호분에서는 광배 모양 금동관, 긴 철판을 가로로 이어 만든 갑옷, 투구가 나왔어요.

이 무덤들은 4~6세기에 만들어진 대가야 지배층의 무덤으로 보고 있어요. 학자들 사이에서는 5세기 전반에서 6세기 전반에 걸친 것으로 보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어요.

2023년, 이곳을 포함한 가야고분군 7곳이 유네스코 에 등재됐어요.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 고령 지산동, 김해 대성동, 함안 말이산,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성 송학동, 합천 옥전 고분군이에요. 우리나라의 16번째 세계유산이에요.

글씨가 남은 것

2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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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가 남은 것중국 지린성 지안 · 414년에 세움

돌기둥 네 면에 새긴 1,775자

아들이 아버지의 무덤 가까이에 세운 비석이에요. 고구려가 남긴 가장 큰 글자 기록이에요.

광개토왕릉비예요. 지금은 유리로 둘러싼 비각 안에 서 있어요. 돌 표면에 네모난 글자가 줄지어 새겨진 것이 보이고, 왼쪽 아래 사람과 견주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어요.

광개토왕릉비예요. 지금은 유리로 둘러싼 비각 안에 서 있어요. 돌 표면에 네모난 글자가 줄지어 새겨진 것이 보이고, 왼쪽 아래 사람과 견주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어요. · 사진 EditQ (위키미디어 공용) · CC BY-SA 4.0 · 우리나라가 아니라 지금은 중국 지린성 지안에 서 있어요

한 줄로 말하면높이 약 6.39미터 돌기둥 네 면에 1,775자쯤을 새겼어요.

6.39m광개토왕릉비의 높이 (약)

중국 지린성 통화시 지안시에 커다란 돌비석이 서 있어요. 광개토왕릉비예요. 고구려 제20대 장수왕이 세웠어요.

비석에 «갑인년 9월 29일에 왕릉으로 시신을 옮기면서 비를 세웠다»는 말이 있어요. 그래서 세운 해를 414년으로 보고 있어요. 광개토왕이 세상을 떠난 뒤 아들 장수왕이 세운 거예요.

크기부터 놀라워요. 자연석을 캐서 다듬어 세운 네 면 비석이고, 높이는 약 6.39미터예요. 돌은 단단한 응회암이에요.

글자는 1면 11행, 2면 10행, 3면 14행, 4면 9행으로 모두 44행이에요. 원래 글자 수는 1,775자쯤이었다고 보고 있어요. 그중 140자 넘게는 지금 읽을 수 없어요. 세월에 닳기도 하고 사람 손에 상하기도 했거든요.

글자를 고르게 새기려고 네 면 가장자리에 테두리 선을 그었어요. 그 안에 13센티미터쯤 간격으로 세로 줄을 긋고 글자를 새겼어요. 글자꼴은 예서에 가까워요.

이 비석은 고구려가 망한 뒤 오랫동안 잊혀 있었어요. 조선 세종 때 지은 『용비어천가』의 뜻을 풀이한 주해에 «북쪽 7리에 비가 있다»는 기록이 나와요. 하지만 조선 시대 사람들은 그것을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의 으로 알았어요.

1880년 무렵 청나라가 이 지역에 사람이 들어와 살 수 있게 하자, 한 농부가 비를 발견해 관청에 알렸어요. 그렇게 다시 세상에 나왔어요.

비석에서 남서쪽으로 400미터쯤 가면 태왕릉이 있어요. 왕릉급 무덤 가운데 가장 큰 무덤이에요. 북동쪽으로 1.7킬로미터쯤 가면 장군총이 있어요. 우리 학계에서는 장군총을 광개토왕의 무덤으로 보는 연구자가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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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가 남은 것일본 나라현 이소노카미 신궁 소장 · 백제

가지가 일곱인 칼에 금으로 박아 넣은 글자

백제에서 만들어 바다 건너로 보낸 칼이에요. 이런 모양의 칼은 아직 다른 곳에서 발견된 적이 없어요.

칠지도의 가운데 줄기와 가지들이에요. 줄기를 따라 금빛 글자가 세로로 이어져 있어요. 가지가 좌우로 엇갈려 뻗은 모양이 잘 보여요.

칠지도의 가운데 줄기와 가지들이에요. 줄기를 따라 금빛 글자가 세로로 이어져 있어요. 가지가 좌우로 엇갈려 뻗은 모양이 잘 보여요. · 사진 Gary Todd (위키미디어 공용) · CC0 · 일본 이소노카미 신궁에 있는 실물이 아니라, 한성백제박물관에 전시된 복제품을 찍은 사진이에요 · 내용과 어울리는 참고 사진이에요

한 줄로 말하면가지가 일곱인 철제 칼이에요. 양면에 금으로 박아 넣은 글자가 61자 남아 있어요.

74.9cm칠지도의 전체 길이

칠지도는 일본 나라현 덴리시의 이소노카미 신궁에 있는 백제 시대의 철제 칼이에요. 철을 두드려서 만들었어요.

전체 길이는 74.9센티미터고, 손잡이와 이어지는 부분을 뺀 칼날은 66.5센티미터예요. 칼의 양쪽 날에서 소뿔이나 나뭇가지처럼 굽은 가지가 각각 3개씩 일정한 간격으로 뻗어 나와 있어요.

이런 모양은 아직 다른 곳에서 발견된 바가 없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이름이 무엇인지 의견이 갈렸어요. 칼이 아니라 창으로 본 사람도 있었어요.

1873년부터 1877년 사이의 일이에요. 이소노카미 신궁의 대궁사로 있던 간 마사토모가 칠지도에 붙은 녹을 닦아냈어요. 그때 칼 양쪽 옆면에서 금으로 박아 넣은 글자가 나왔어요. 금속에 홈을 파고 다른 금속을 박아 넣는 이 기법을 이라고 해요.

글자는 한쪽 면에서 34자, 다른 쪽 면에서 27자의 흔적이 확인됐어요. 글자 둘레에는 금선을 가늘게 둘러 놓았어요. 이 글자 덕분에 이것이 칼이고, 만들 때의 이름이 칠지도였다는 것이 분명해졌어요.

앞면에는 «백 번이나 단련한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다. 이 칼은 온갖 적병을 물리칠 수 있다»는 말이 있어요. 뒷면에는 «지금까지 이러한 칼은 없었는데 백제 왕세자가 왜왕 지를 위해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는 말이 있어요.

다만 흐려진 글자가 적지 않아서, 읽는 방법은 연구한 때와 학자에 따라 조금씩 달라요. 만든 해도 아직 확정되지 않았어요. 칼을 만들어 보낸 백제 왕을 근초고왕으로 보는 연구자가 많지만, 다른 왕을 꼽는 연구도 있어요.

분명한 것은 이거예요. 백 번 두드린 강철에 금으로 글자를 박아 넣을 만한 솜씨가 그때 백제에 있었어요. 그리고 그 칼이 바다를 건너가 1,500년 넘게 전해지고 있어요.

더 찾아볼 곳

여기서부터 스스로 더 찾아볼 수 있어요
  • 국가유산포털

    국가유산청이 운영해요. 유적과 유물의 이름을 넣으면 사진과 설명, 있는 곳과 지정된 날짜까지 한자리에서 볼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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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을 사진으로 찾아볼 수 있어요. 큐레이터가 유물 하나를 길게 풀어 쓴 「추천 소장품」 글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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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이 만들어요. 유적과 유물이 언제 어디서 나왔고 크기가 얼마인지, 학자들 사이에 무엇이 갈리는지까지 적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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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역사넷 한국사 연대기

    국사편찬위원회가 만든 곳이에요. 유적 하나를 발굴 과정까지 따라가며 읽을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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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립공주박물관

    무령왕릉에서 나온 유물을 모아 둔 곳이에요. 지석과 돌짐승, 금으로 만든 장식을 볼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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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립부여박물관

    백제 금동대향로가 있는 곳이에요.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나온 다른 유물도 함께 볼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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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 사전

본문에서 밑줄 친 말에 손가락을 올리면 뜻이 떠요
유적
옛사람이 살거나 무언가를 한 자리가 땅에 남은 것이에요. 마을 터, 무덤, 절터 같은 것이 유적이에요.
유물
옛사람이 만들어 쓰던 물건이 남은 것이에요. 토기, 돌도끼, 금관 같은 것이 유물이에요.
발굴
땅속에 묻힌 유적과 유물을 조사하려고 순서를 지켜 땅을 파 내려가는 일이에요. 어느 층에서 나왔는지를 함께 기록해요.
주먹도끼
구석기 시대에 돌을 떼어 내 날을 세운 연장이에요. 자르고 찍고 파는 데 두루 썼어요.
문화층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남아 있는 흙층이에요. 층이 여럿이면 여러 시기에 걸쳐 사람이 살았다는 뜻이에요.
움집
땅을 얕게 파고 기둥을 세워 지붕을 얹은 집이에요. 신석기·청동기 시대에 많이 지었어요.
취락
집이 여럿 모여 이룬 마을이에요.
빗살무늬 토기
겉면에 빗처럼 생긴 도구로 찍거나 그어 무늬를 낸 신석기 시대 토기예요. 지역과 시기에 따라 모양이 달라요.
암각화
바위에 쪼거나 갈아서 새긴 그림이에요.
고인돌
굄돌 위에 커다란 덮개돌을 얹은 청동기 시대의 무덤이자 기념물이에요.
비파형 동검
칼날 아래쪽이 비파라는 악기처럼 불룩한 청동 칼이에요. 손잡이를 따로 만들어 끼워요.
의기
제사 같은 의식에 쓰는 도구예요. 실제로 일할 때 쓰는 연장과 달리 꾸밈이 많아요.
벽돌무덤
구운 벽돌을 쌓아 만든 무덤이에요. 무령왕릉이 이렇게 지어졌어요.
지석
무덤에 묻힌 사람이 누구인지, 언제 묻혔는지를 적어 무덤 안에 넣은 돌이에요.
고분
옛날에 만든 무덤이에요. 흙을 높이 쌓아 봉분을 만든 것이 많아요.
벽화
무덤이나 건물의 벽에 그린 그림이에요.
돌무지덧널무덤
나무로 덧널을 짜고 그 위에 냇돌을 쌓은 뒤 흙을 덮어 만든 신라의 무덤이에요.
말다래
말을 탈 때 흙이 튀지 않도록 안장 양쪽에 늘어뜨리는 판이에요.
금관
얇은 금판을 오려 만든 관이에요. 신라의 무덤에서 여러 점 나왔어요.
상감
금속이나 도자기에 홈을 파고 다른 재료를 박아 넣어 무늬나 글자를 내는 기법이에요.
세계유산
인류가 함께 지켜야 할 값어치가 있다고 유네스코가 정해 목록에 올린 유산이에요.

땅속에서 올라온 이야기
여기 실은 것들은 어디서 언제 나왔는지가 모두 적혀 있어요. 연천 전곡리도, 서울 암사동도, 강화 부근리도 지도에서 찾을 수 있고 직접 가 볼 수도 있어요. 연대와 크기, 발굴 연도 같은 숫자는 국가유산청과 국립중앙박물관,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올려 둔 글에서 그대로 가져왔어요. 꼭지마다 붙은 「찾아본 곳」을 누르면 그 글로 바로 갈 수 있어요. 옛사람들은 글을 남기지 않았지만 쓰던 물건과 살던 자리를 남겼어요. 그것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읽어 내는 일은 여러분 몫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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